한권의 책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

깜장소 2024. 1. 8. 10:00

2022-01-24

 

제목 : 유유의 귀향

저자 :  권내현

 

만족 8/10   재미 : 7/10  추천 : 7/10


시작은 1556년(명종11년) 대구의 양반인 유씨집안의 차남 유유의 가출로부터 비롯된다. 아버지 유예원은 지방현감을 지낸 대구 지역 호족으로 아들 셋에 딸 둘이 두었으며 모두 성가시킨 상태였다. 차남 유유는 형 유치가 일찍 죽어 사실상의 장남이었다. 가출의 원인으로 아버지 유예원과 유유의 처 백씨 등은 유유가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고 얘기한다. 그 말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아버지, 처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자식도 없던 유유가 두번의 가출 끝에 사라지자 동생 유연이 장남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 유예원이 죽자 집안 어른들과 상의 끝에 유연이 장례를 치루게 된다. 이후 삼남 유연이 사실상 장남으로 집안을 끌어가게 된다.

 

유유가 가출하고 6년이 지난 1562년 서울에 사는 매형 이지가 유유를 찾았다고 기별을 전하게 된다. 이지는 유유는 채응규라는 이름으로 황해도에서 살고 있었고 첩과 아들까지 두었으며 서울로 불렀으니 모셔가라는 소식을 전한다. 소식을 들은 유연은 노비 둘을 보내 형인지 확인하고자 했으나 너무 달라진 모습에 노비들의 의견이 엇갈리게 된다. 이에 서울로 직접 찾아간 유연은 채응규를 만나 대구까지 동행하게 된다. 너무 낮선 모습과 대구로의 며칠 간 동행으로 유유가 아니라고 확신을 한 유연은 채응규를 유유의 사칭죄로 대구관아에 고발한다. 대구관아에 잡힌 채응규는 자신이 유유가 맞다며 상세한 집안의 사정까지 얘기한다. 유유의 얘기를 들은 집안 친척 몇은 그가 유유가 맞다고 옹호하기도 한다. 채응규는 결정적으로 처 백씨와의 첫날밤, 치마를 벗기려 했으나 생리라고 거부하는 백씨 때문에 첫날밤을 치루지 못했다고 진술한다. 유유의 처 백씨는 대질은 거부한채 그런 사실이 있었다고 진술한다. 결론은 나지 않고 설왕설래하는 사이 채응규는 그의 첩 춘수를 통해 많이 아프다며 오늘날의 보석에 해당하는 보방을 요청하게 된다. 관노의 집에 머무는 조건으로 청원이 받아들여져 채응규는 석방된다. 그런데 며칠 뒤 채응규가 사라져 버린다. 처음에는 가짜임이 탄로난 채응규가 처벌이 두려워 도망을 갔다고 읽힐만 했다. 그런데 사건은 그렇게 간단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채응규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그의 첩 춘수는 유연이 관노와 모의하여 형 유유를 죽인 것이라고 고발까지 하게 된다. 유유의 실종사건이 갑자기 살인사건으로 옮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도 없었고 춘수의 진술만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증거도 없었던 사건이 갑자기 돌변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 유유의 처 백씨가 남편 유유의 살인범으로 유연을 처벌해 달라는 호소를 접수한 것이다. 즉 형의 재산을 욕심낸 시동생 유연이 관노에게 뇌물을 주어 남편 유유를 살해 했다는 것이다. 유유의 아내 백씨의 호소로 유연을 점차 피의자로 보는 국면으로 전환된다. 결국 사건은 경상감영의 판결이 나기도 전에 중앙의 의금부로 이관된다. 그것이 사건이 당시에 가장 심각하게 다루는 중범죄인 강상죄에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강상죄는 부모,형제 살해, 노비의 주인 살해 등으로 조선시대 가장 중히 여기는 범죄였다. 위관을 맡은 우의정 심통원은 처음부터 유연을 강하게 의심한 듯 했다. 결국 모진 고문을 통해 유연과 관노에게 유유를 살해해서 금호강에 유기했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나중에 형 유유가 나타나면 나를 살려낼 것이냐는 유연의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유연은 능지처참에 취해진다.

 

유연이 처형되고 여러해가 흘렀다. 이 사건에 의구심을 느낀 사람들에 의해 몇번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무시되었다. 몇해가 지나 홍문관 수찬을 지낸 윤국영이 이 사건을 전해 듣고는 자신이 살아 있는 유유를 만났다고 진술한다. 윤국영은 1560년 평안도에서 유유를 만났으며 그는 천유영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가 실재 유유가 맞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1579년 선조는 이 사건의 재조사를 명한다. 평안도에서 잡혀온 천유용은 자신이 유유임을 자백하게 된다. 그리고 동생 유연의 죽음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제 사건은 채응규는 누구이며 그가 왜 가짜 유유행세를 했는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채응규를 찾는 일이 급선무가 되었다. 채응규를 찾는 일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그는 여전히 황해도 해주일대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채응규와 그의 첩 춘수를 체포한 사헌부는 그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런데 압송도중 채응규가 자살을 하고 만다. 이제 진실은 그의 첩 춘수를 통해 확인해야만 했다. 고문을 받는 그의 입에서 유유의 매형 이지의 이름이 튀어 나온다. 즉 1562년 이지가 노비를 보내 채응규가 유유라 했다고 진술을 한다. 즉 채응규를 서울로 부르고 유유 주변을 일을 익히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일의 범인으로 이지로 지목되었다. 이지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지는 모진고문에도 쉽게 승복하지 않았다. 즉 춘수의 진술은 자신에 대한 무고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지는 심문과정에서 자백하지 않고 버티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결국 이 사건은 유유의 매형 이지가 재산을 노려 가짜 유유를 내세운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의 요청으로 이항복에 의해 '유연전' 같은 책들이 저술되며 억울하게 죽은 유연을 기리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재산을 노린 매형 이지에 의한 계획된 범행이라는 최종결과에도 불구하고 석연치 않은 점들은 남아 있다. 당시 상속제도는 형제간의 균분상속이 일반적이었다. 즉 16C까지 조선은 형제 뿐 아니라 딸자식에게도 균분상속이 일반적이 었다. 제사를 모시는 장남 뿐 아니라 제사를 모시는 봉사자에게 10% 정도의 재산을 더 주었으며 제사는 딸자식까지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 봉사도 상당히 많이 존재 했다. 형제균분상속은 경국대전에도 기록되어 있는 법도였으며 장자에게 재산을 몰아주기 시작한 것은 17C 이후 부터 일반화 되기 시작한다. 즉 이지의 입장에서 받을 재산이 그의 처남 유연과 별다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식이 없었던 이지의 입장에서 자신의 처가 죽으면 처가에게 받은 재산을 다시 돌여주어야 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이 책은 유유의 가출로 부터 비롯된 사건에서 시작해 조선시대의 상속과 재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자 중심의 상속재도는 17C이후 부터 조선 후기에 와서야 일반화 된다. 당시 형제균분상속이 이루어 진 것은 조선 중기까지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처가살이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17C 이전까지는 처가에서 결혼을 하고 처가에서 사는 처가살이가 많이 존재했다.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던 딸은 재산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식없이, 특히 아들없이 죽는 많은 집안에서 딸에게 상속은 집안 재산을 이어나가는 중요한 수단으로 고려되었다. 즉 장자가 없는 경우가 빈번하게 생기면서 그 대안으로 차남이나 딸들에게 상속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오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등장한다. 바로 양자를 들이는 것이다. 자식없는 집에서는 양자를 통해 장자를 세워 집안의 제사와 재산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아들을 못둔 며느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아들이 없어 종부의 지위를 빼앗기는 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등장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경우를 보자. 김정희는 장남이며 동생 두 명을 두고 있다. 그런데 김정희에게는 아들이 한명있었는 데 그는 서자였다.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향을 가게되자 김정희의 처 예안이씨는 양자를 들였다고 제주도에 있는 김정희에게 알린다. 즉 환갑이 눈앞에 둔 김정희에게 문제가 발생할 때 그 집안의 상속문제는 복잡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김정희의 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김정희와 상의할 시간도 없이 양자를 들여 적장자를 세우고 김정희에게 알린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김정희도 잘했다며 처의 노고를 치하한다.

 

이 책은 유유의 가출로 비롯된 사건을 따라가며 조선의 상속제도를 다루고 있다. 조선의 상속제도는 흔히 알고 있듯이 장자상속만은 아니였으며 조선 후기로 오며 변화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