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타고 떠나는 백두산 천지여행
2013-09.23
지난 2013년 7월 30일부터 8일간 백두산 천지를 다녀왔습니다. 물론 천지만 다녀온 것은 아니고 신의주 맞은편 도시인 단동과 고구려 유적탐방이 포함된 여행입니다. 보통 백두산은 비행기를 타고 3박4일정도의 일정으로 가는 것이 보통인데, 이번은 배를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왜냐구요? 저렴합니다^^
집사람과 작은녀석이 인천국제여각터미널에서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있군요. 터미널 지하에 식당이 있습니다. 가격이나 맛 모두 그냥 그렇습니다만 주변에 다른 식당이 없으니 어쩔수 없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여행은 시간이 많습니다. 이번에도 거의 2박3일을 배에서 보내야 합니다. 그래 심심하지 않으려면 여러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번에는 영화, 다큐멘터리를 저장한 노트북과 PMP 그리고 잡지와 책 한권을 준비했습니다. 이만하면 심심할 일 없겠지요^^
이제 출발입니다. 타고가는 배는 중국국적 범영페리소속의 자정향(紫丁香) 입니다. 3만톤이 조금 안되는 배로 인천과 영구사이를 운항하는 정기 여객선입니다. 紫丁香은 중국어로 라일락을 말합니다. 배이름에 꽃이나 여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뱃사람의 오래된 관습입니다. 꽃이나 여자처럼 바다가 부드러웠으면하는 바램이었겠지요. 몇번의 경험이지만 3만톤에 가까운 배도 날씨가 사나우면 일엽편주처럼 흔들립니다. 한강에 운하를 만들어 서울과 상하이간을 5000톤짜리 배로 항해하겠다던 명바기의 4대강 사업에 코웃음이 나온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사실 편안한 배여행이 가능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이전의 바다여행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날씨도 알 수 없는 망망대해를 30m자리 목선으로 다닌 다는 것은 제정신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수 많은 뱃사람들은 바다로 바다로 나가고, 심지어 대항해시대라는 말까지 만들어 냈을까요? 그만한 이익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찾게 된 이유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서 라는 것은 다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럼 왜 기를 쓰고 인도를 가려했을까요? 그것은 향신료 때문입니다. 15,6세기 향신료의 가치는 말그대로 금값이었습니다. 후추는 같은 무게의 금과 교환되었고, 넛맥이라고 불리는 육두구 500g은 여자노예 3명 혹은 소 7마리와 교환되어 금보다도 휠씬 비쌋습니다. 문제는 이 향신료 무역을 베네치아 공화국이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새로운 항로를 통해 인도로 가려는 시도가 줄을 잇습니다. 결국 이 노력은 바스코 다가마에 의해 결실을 맺습니다. 멀리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한 바스코 다가마는 가지고 간 모든 것들을 향신료로 바꾸어 배에 싣습니다. 그리도 다시 희망봉을 돌아 도착했을 때, 그는 들어간 총비용의 600 배를 이익으로 남깁니다. 이후 모든 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바다로 바다로 나가게 됩니다.
카나페를 만들어 한잔합니다. 크래커에 햄과 치즈 그리고 참치를 살짝 올려 먹으면 간단한 간식이나 안주로도 좋습니다. 배나 기차로 장거리 여행할 때마다 만들어 먹는 단골 메뉴입니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배에서 보낸 후 새벽에 영구항에 도착합니다. 영구항에서 단동으로 이동합니다. 5시간 거리. 중국에서는 옆집 마실가는 거리 되겠습니다^^ 위 사진 빨간선은 제 여행 코스가 아닙니다. 스카우트 북부연뱅 홈피에서 무단으로 사진을 퍼오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미안합니다. 꾸벅
단동에 도착합니다. 단동은 신의주를 마주한 국경도시로 압록강 하구입니다. 뒤로 보이는 다리가 중조우의교(中朝友谊橋) 입니다. 다리가 두개인데 앞쪽다리는 6.25 때 폭격에 맞아 끊어진 채로 있습니다.
건너편 신의주가 보입니다. 사실 단동은 안동(安東)이라 불리던 작은 시골마을이었습니다. 20세기 초 신의주와 마주 보고 있는 국경이라는 이유로 일제에 개항이 되었고, 1965년에 단동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이 보잘 것 없던 마을은 이제는 인구 100만의 대도시로 성장하여 밤이면 불야성을 이룹니다. 반면 신의주는 거의 발전하지 못하고 밤이면 꺼질듯한 희미한 불빛만을 내 비치고 있습니다. 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얼마나 어려울까요...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이 편치 만은 않습니다.
압록강에서 유람선을 타봅니다. 압록강은 북한과 중국이 수면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즉 아주 가까이 북한 땅에 접근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지요.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들. 북한 산들의 특징입니다.
어족도라는 북한의 섬입니다. 위화도 위쪽에 위치하는 섬인데 면적은 여의도보다 크다고 합니다. 압록강 수계의 섬들은 1962년 중조 국경조약을 통해 국경을 확정합니다. 압록강 전체 205개중 127개가 북한, 78개가 중국쪽에 귀속됩니다. 특이할 만한 점은 하류에 있는 대부분의 큰섬은 다 북한의 영토이고 면적으로 보면 94.8% 가 북한의 영토입니다. 백두산 천지 또한 55%가 북한의 영토입니다.
수 많은 나라와 분쟁을 겪고 전쟁도 불사하며 영토문제에 관해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중국이 어떻게 북한과는 이런 영토 조약을 체결했나 이상할 지경입니다. 북한이 6.25 참전의 댓가로 백두산 영토의 상당부분을 양보했다고 제멋대로 떠들던 우리나라 일부 언론의 보도가 생각나는군요. 한가지 특이할만한 점은 백두산의 중국쪽 관광객이 북한쪽 영토로 넘어와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다는 다는 것입니다. 그덕에 제 식구들도 북한 땅을 밟아봅니다.
단동에서 통화로 가는 중 휴게소에 들립니다. 단동에서 통화까지는 고속도로로 5시간, 이전에는 8시간 걸렸다고 합니다. 새로 생긴 휴게소가 깨끗합니다. 사실 중국여행에서 가장 고생스러운 것이 화장실 문제입니다. 2008년 베이찡올림픽 이후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것도 대도시 이야기이고 대부분의 시골은 그야말로 으악! 수준입니다. 중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두가지 있다고 하네요. 첫째는 어떻게 화장실이 자기들 안방보다도 깨끗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먹이는 주면서 그 맛난 새를 왜 잡아먹지 않는가 라고 하네요. 그러게요^^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둘기를 안 잡아 먹지요?
통화시에 도착했습니다. 이 산골짜기 도시까지 이 정도라.... 빠르게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다음날 통화에서 백두산으로 출발합니다. 왕복 8시간, 그것도 예상일뿐입니다. 결국 나중에 보니 11시간 걸렸습니다. 가던 길에 들린 고구려휴게소, 이름이 마음에 드는군요. 조선족 아주머니께서 하시는 사설휴게소입니다.
점심식사 차 들린 휴게소에서 장백산산삼을 팔고 있습니다. 가격도 상당히 비쌉니다. 실제 백두산 산삼이냐구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만 가이드가 한마디 합니다. '포장한 나무 상자가격이 더 비쌀걸요'
드디어 입구에 도착합니다. 입장료도 대단히 비쌉니다. 셔특버스비 포함해서 250위안이니 우리돈으로 5만원 가까이 됩니다. 중국의 입장료 참 비쌉니다. 황산이나 장가계는 케이블카 포함해서 거의 10여만원 정도이고 아무리 보잘것 없는 곳을 가도 3,40위원(7,8천원) 정도는 받습니다. 입장료도 거의 없고, 있어도 몇천원 수준인 우리나라에 살다가 보니 더 비싸게 느껴집니다.
입구부터 자작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 크기가 흔히 듣던 백두산 원시림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물어보니 1980년대 후반 동해쪽에서 올라온 태풍에 대부분의 큰나무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나무들은 그 이후에 다시 자란 나무들이라고 하네요. 1980년대의 원시림을 회복하려면 200년은 족히 걸린다고 합니다. 참 가꾸기는 힘들어도 피해 받기 쉬운 것이 숲인 것 같습니다.
셔틀버스가 올라가자 초원이 나타납니다. 해발 2000m 수목한계선을 넘어서니 나무는 없고 풀과 야생화들의 천국입니다. 이 초원이 백두산 특유의 독특한 풍광들을 만들어 냅니다.
백두산을 올라가는 길은 대략 3가지 코스입니다. 가장 많이 이용하는 북파코스, 그리고 서파코스, 그리고 얼마전 새로 열린 남파 혹은 두만강코스 등이 있습니다. 저는 남파 코스를 가려 했으나 산사태로 입장이 불가능해져 서파코스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코스는 중국쪽에서 오르는 백두산을 말합니다. 북한을 통해 백두산 장군봉에 오를 날은 언제일까요?
1400여개의 계단을 오르니 천지가 얼굴을 드러냅니다. 일년에 두달정도 천지가 보인다고 하는데 저는 운이 좋은 편에 속하는 군요. 중국에서도 천지라는 이름은 산 정상에 있는 호수에만 붙인다고 하네요. 중국전역을 통틀어 보면 천지라는 이름을 가진 호수가 세곳 있습니다. 저는 그 세곳을 다 가보았는데, 그 규모나 경치, 신비스러움면에서 백두산 천지를 따라올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워낙 날씨변화가 심해 구름이 꼈다가 사라지고,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고 하여간 변화무쌍입니다.
백두산은 정상부근의 회백색 장석과 눈때문에 사시사철 하얀게 보인다고 합니다.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나온 배경이기도 하구요. 백두산의 중국 이름인 장백산도 같은 뜻입니다.
내려오는 길에 발견된 지 얼마 안된 주정대협곡이라는 곳을 들립니다. 거칠은 화산재들이 그대로 들어나 있는 계곡입니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낙타와 똑 닮은 바위도 보이는 군요. 이렇게 백두산 답사를 마치고 6시간 걸려 통화시로 돌아갑니다. 백두산 부근에 묶지 않고 다시 돌아가는 이유는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 유적이 남아 있는 집안시를 가기 위함입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 집안시에 도착합니다. 집안시 안에 있는 고구려 국내성은 중국의 동북 공정의 시작과 더불어 정리된 유적들이 많습니다. 정리 후 자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까지 해버립니다.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사실 자국의 조선족과 소수민족의 내부단속용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우리 중국은 예전부터 같은 민족이었다 고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자니 '중화민족' 이라는 없던 개념도 만들어 냅니다. 중국 내부사정이야 어떨 지 몰라도 멀쩡한 남의 나라 역사를 자기 것이라고 우기고 나서니 우리는 황당할 따릅입니다.
광개토 대왕릉입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구 그렇게 추정되는 무덤입니다.
광개토 대왕비입니다. 19세기 일본에 의해 발견된 이후 수 많은 논쟁과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비석입니다. 특히 유실되어 보이지 않는 글짜를 포함한 해석상의 문제로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 비석만 보고 싶으시면 구태여 집안까지 가실 필요없습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실물과 같은 크기로 똑같이 재현해 놓고 있습니다.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입니다. 사실 고구려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이런 유적과 더불어 다양한 유물을 정리하여 역사, 문화, 생활사를 정리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유물을 정리하는 박물관은 필수적이구요. 중국은 자기 역사라고 주장만 할 뿐 고구려의 역사를 세우고 사회생활상을 정리할 의지는 없는 것 같군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말이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단동의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記念館)입니다. 중국이 6.25 전쟁에 참여한 것을 기록한 기념관 입니다. 기념관의 이름에서 중국이 바라보는 6.25전쟁의 성격이 드러나 있습니다.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와준 전쟁' 이라는 것이지요.
기념관 로비는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악수하는 동상이 장식합니다.
김일성이 마오쩌둥에게 원조를 요청한 친필 편지입니다.
사실 이 기념관을 구경하면서 당시 1950년 당시 중국의 입장이 궁금해졌습니다. 당시 미국은 2차대전에서 승리한 전세계 최강 국가. 중국은 국공내전 승리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지 1년된 신생국가. 기념관 안에 도표로도 정리해 놓았습니다만 두 나라는 모든 면에서 비교도 되지 않는 국력차이가 있었습니다. 국민소득, 자동차대수, 철강생산량 등 모든면에서 중국은 미국의 10/1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미국에 맞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신생 독립국인 중국의 존립 근거조차 허물어 질 수 있는 중차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참전을 결정합니다. 물론 단순히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순수한 생각은 아니었겠지요. 북한이 허물어졌을 때 중국은 북쪽의 북한부터 프랑스 영향하에 있는 남쪽 베트남까지 서방세계에 포위되는 형국이었습니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너무 시린 것이지요. 이런 위기 의식이 중국의 전쟁 참여를 이끌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전쟁 참여는 다른 면에서 중국 현대사에 커다란 여행을 끼치고 있습니다.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이 전사한 것입니다. 가정이기는 하지만 마오쩌둥 사후 마오안잉이 살아 있었다면 그 권력은 누구에게 넘어 갔을 까요? 과연 덩샤오핑으로 권력이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역사의 가정은 아무 의미없는 것이지만요.
6.25때 쓰던 장비를 전시해 놓고 군사 체험공원이라고 돈을 받고 있습니다. 하여간 중국넘들입니다^^
이렇게 중국여행을 마무리하게됩니다. 중국여행의 특징인 장거리 이동, 불친절, 온갖 더위 다 겪으며 지낸 8일이지만 나름 의미 있던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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