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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백두산 천지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 - 조중국경변계조약에 대하여

2013.8.14

지난 2013년 7월 30일부터 8일간 백두산 천지를 다녀왔다. 물론 천지만 다녀온 것은 아니고 신의주 맞은편 도시인 단동과 고구려 유적탐방이 포함된 일정이다. 보통 백두산은 비행기를 타고 3박4일정도의 일정으로 가는 것이 보통인데,  이번은 배를 타고 가기로 했다. 새로운 코스이기도 하고 가격도 저렴하다. 

배를 타고 가는 여행은 시간이 많다. 이번에도 거의 2박3일을 배에서 보내야 한다. 그래 심심하지 않으려면 여러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이번에는 영화, 다큐멘터리를 저장한 노트북과 PMP 그리고 잡지와 책 한권을 준비하기로 했다. 이만하면 심심할 일 없겠지.

이제 출발. 타고가는 배는 중국국적 범영페리소속의 자정향(紫丁香). 3만톤이 조금 안되는 배로 인천과 영구사이를 운항하는 정기 여객선이다.  紫丁香은 중국어로 라일락을 말한다. 배이름에 꽃이나 여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뱃사람의 오래된 관습이다. 꽃이나 여자처럼 바다가 부드러웠으면하는 바램일 것이다. 몇번의 경험이지만 3만톤에 가까운 배도 날씨가 사나우면 일엽편주처럼 흔들린다. 한강에 운하를 만들어 서울과 상하이간을 5000톤짜리 배로 항해하겠다던 경인운하 사업이 현실성 없어 보이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사실 편안한 배여행이 가능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전의 바다여행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날씨도 알 수 없는 망망대해를 3,40m짜리 목선으로 다닌 다는 것은 제정신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수 많은 뱃사람들은 바다로 바다로 나가고, 심지어 대항해시대라는 말까지 만들어 냈을까? 그것은 그만한 이익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찾게 된 이유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서 라는 것은 다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럼 왜 기를 쓰고 인도를 가려했을까? 그것은 향신료 때문이다. 15,6세기 향신료의 가치는 말그대로 금값이다. 후추는 같은 무게의 금과 교환되었고, 넛맥이라고 불리는 육두구 500g은 여자노예 3명 혹은 소 7마리와 교환되어 금보다도 휠씬 비쌋다. 문제는 이 동방과의 향신료 무역을 베네치아 공화국이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항로를 통해 인도로 가려는 시도가 줄을 잇는다. 결국 이 노력은 바스코 다가마에 의해 결실을 맺게된다. 멀리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한 바스코 다가마는 가지고 간 모든 것들을 향신료로 바꾸어 배에 싣른다. 그리도 다시 희망봉을 돌아 도착했을 때, 그는 들어간 총비용의 600 배를 이익으로 남긴다. 이후 모든 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바다로 바다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카나페를 만들어 배에서 한잔한다. 크래커에 햄과 치즈 그리고 참치를 살짝 올려 먹으면 간단한 간식이나 안주로도 좋다.  배나 기차로 장거리 여행할 때마다 만들어 먹는 단골 메뉴로 만들기 쉽고 의외로 맛도 훌륭한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배에서 보낸 후 새벽에 영구항에 도착한다. 그리고 다시 영구항에서 단동으로 5시간을 이동한다. 5시간이면 중국에서는 옆집 마실가는 거리 라고 가이드가 너스레를 떤다.
단동은 신의주를 마주한 국경도시로 압록강 하구이다. 북한과의 연결다리가 중조우의교(中朝友谊橋) 다. 다리가 두개인데 한쪽다리는 6.25 때 폭격에 맞아 끊어진 채로 있다.


건너편에 신의주가 보인다. 사실 단동은 안동(安東)이라 불리던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그런데 20세기 초 신의주와 마주 보고 있는 국경이라는 이유로 일제에 개항이 되었고, 1965년에 단동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 보잘 것 없던 마을은 이제는 인구 100만의 대도시로 성장하여 밤이면 불야성을 이룬다. 반면 신의주는 거의 발전하지 못하고 밤이면 꺼질듯한 희미한 불빛만을 내 비치고 있다. 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얼마나 어려울까...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이 편치 만은 않은 것 같다.


압록강에서 유람선을 타본다. 압록강은 북한과 중국이 수면을 공유하고 있다. 즉 아주 가까이 북한 땅에 접근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북한 산들의 특징이다.  


바로 옆으로 어족도라는 북한의 섬이 보인다. 위화도 위쪽에 위치하는 섬인데 면적은 여의도보다 크다고 한다. 압록강 수계의 섬들은 1962년 중조 국경변계조약을 통해 국경을 확정한다. 압록강 전체 205개중 127개가 북한, 78개가 중국쪽에 귀속된다. 특이할 만한 점은 하류에 있는 대부분의 큰섬은 다 북한의 영토이고 면적으로 보면 94.8% 가 북한의 영토가 된다. 백두산 천지 또한 55%가 북한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단동에서 통화로 가는 중 휴게소에 차가 멈춘다. 단동에서 통화까지는 고속도로로 5시간, 이전에는 8시간 걸렸다. 그나마 화장실이 깨끗해서 다행이다.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중국여행에서 가장 고생스러운 것이 화장실 문제이다. 2008년 베이찡올림픽 이후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것도 대도시 이야기이고 대부분의 시골은 그야말로 으악! 수준이다.

 조정래 선생의 '정글만리'에도 언급되지만 중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두가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어떻게 화장실이 자기들 안방보다도 깨끗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먹이는 주면서 그 맛난 새를 왜 잡아먹지 않는가 라고. 그러게,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둘기를 안 잡아 먹을까?  

다음날 통화에서 백두산으로 출발. 왕복 8시간, 그것도 예상일뿐이다. 결국 나중에 보니 11시간 걸렸다.   


점심식사 차 들린 휴게소에서 장백산산삼을 팔고 있다. 가격도 상당한 고가이다. 실제 백두산 산삼일지는  아무도 모르다기에 가이드에게 물어본다. 가이드 한마디 한다. '포장한 나무 상자가격이 더 비쌀걸요'


드디어 백두산 입구에 도착했다. 입장료가 대단히 비싸다. 셔특버스비 포함해서 250위안이니 우리돈으로 5만원 가까이.. 중국의 입장료 참 비싸다. 황산이나 장가계는 케이블카 포함해서 거의 10여만원 정도이고 아무리 보잘것 없는 곳을 가도 3,40위원(7,8천원) 정도는 받는 것 같다. 입장료도 거의 없고, 있어도 몇천원 수준인 우리나라에 살다가 보니 더욱더 비싸게 느껴진다.
입구부터 자작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나무 크기가 흔히 듣던 백두산 원시림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물어보니 1980년대 후반 동해쪽에서 올라온 태풍에 대부분의 큰나무들이 피해를 입었단다. 지금의 나무들은 그 이후에 다시 자란 나무들로, 1980년대의 원시림을 회복하려면 200년은 족히 걸린다고 하니,  참 가꾸기는 힘들어도 피해 받기 쉬운 것이 숲인 것 같다.


셔틀버스가 올라가자 초원이 나타난다. 해발 2000m 수목한계선을 넘어서니 나무는 없고 풀과 야생화들의 천국이다. 이 초원이 백두산 특유의 독특한 풍광들을 만들어 낸다.


백두산을 올라가는 길은 대략 3가지 코스이다. 가장 많이 이용하는 북파코스, 그리고 서파코스, 그리고 얼마전 새로 열린 남파 혹은 두만강코스 등이 있다. 나는 남파 코스를 가려 했으나 산사태로 입장이 불가능해져 서파코스로 오르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코스는 중국쪽에서 오르는 백두산을 말한니다. 북한을 통해 백두산 장군봉에 오를 날은 언제일까?     


1400여개의 계단을 오르니 천지가 얼굴을 드러낸다. 일년에 두달정도 천지가 보인다고 하는데 나는 운이 좋은 편에 속하나보다. 중국에서도 천지라는 이름은 산 정상에 있는 호수에만 붙인다. 중국전역을 통틀어 보면 천지라는 이름을 가진 호수가 세곳 있다. 나는 그 세곳을 다 가보았는데, 그 규모나 경치, 신비스러움면에서 백두산 천지를 따라올 곳은 없는 것 같다. 워낙 날씨변화가 심해 구름이 꼈다가 사라지고,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고 하여간 변화무쌍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중국쪽에 속하는 백두산이다. 천지는 전체면적 중 55%가 북한에 속하고 45%가 중국에 속한다. 이것은 1962년 김일성과 주은래사이의 조중국경변계조약에서 확정되었다. 앞서 설명한 압록강의 섬들도 이 조약에 의해 국경이 확정되었다. 두만강의 포함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천지의 면적은 북한에 55%가 속하게 되었고, 압록강 두만강 수계의 섬 451개 중 북한이 264개 중국이 187개를 나누어 가진다. 그런데 면적으로 보면 압록강 두만강의 섬 전체 면적의 86% 가 북한으로 14%가 중국에 속하게 된다. 즉 대부분의 큰섬들은 북한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이다.

수 많은 나라와 분쟁을 겪고 전쟁도 불사하며 영토문제에 관해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중국이 어떻게 북한과는 이런 영토 조약을 체결했나 이상할 지경이다. 8.90년대 북한이 6.25 참전의 댓가로 백두산 영토의 상당부분을 양보했다고 멋대로 떠들던 우리나라 일부 언론도 있었다. 사실 이 조약에 대한 내용도 2000년 카톨릭대 안병욱 교수가 연변의 고서점에서 조중국경변계조약이 실려있는 문건을 찾아낸 이후에 알려진 것이다.

그러면 왜 중국은 북한과 이런 영토조약을 맺었을까?
몇가지 원인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중소국경 분쟁에 이은 사회주의 패권다툼의 영향으로 보인다. 50년대말 우수리강 유역의 영토문제로 전쟁까지 치른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60년대 내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북한은 이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 외교를 한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등거리를 외교를 하면서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얻어낸다. 특히 마오쩌둥은 정치 외교 안보적인 이해관계상 북한을 중국편으로 남겨놓기 위해 많은 물자를 지원한다. 이른바 3대 전략물자라 해서 경제적인 계산은 하지않고 매년 석유 150만톤, 식량 100만톤, 코크스탄500만톤 정도의 지원을 하게 된다. 이 줄타기 외교속에서 열린 국경협상이었고 중국은 소련을 의식해 상당부분 양보한 속에서 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는 북한의 협상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주은래를 북한으로 불러들여 협상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간도협약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땅을 일본이 중국에 넘겨주었으니 그 조약부터 무효라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중국이 일본과의 간도협약을 무효라는 북한의 주장을 인정해줄리는 없으나 협상의 과정에서 일정정도 양보를 얻어내는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1960대 북한은 경제 발전 성과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4.19가 일어난 1960년에 우리의 국민소득은 87달러였다. 반면 북한 148달러로 우리보다 1.6배이상 잘 살고 있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일정정도의 성공과 소련,중국 및 둥구권의 일명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도움이 많이 있었다. 이런 자신감으로 조중국경변계조약을 맺어 국경을 확정하자고 먼저 제의한 것도 북한이었다

이런 몇 가지 원인으로 조중국경변계조약은 북한에게 유리하게 체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영토에 관해 불리한 조약을 체결한 한 이유로 중국은 이 조약의 존재 자체를 비밀에 붙인다. 중국에서 이 조약에 대한 문건이 발견된 것도 1999년이 되어서이다. 

 북한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천지를 비롯한 북한 중국의 국경문제는 있는 사실 그대로 보아야 될 것으로 여겨진다.



백두산은 정상부근의 회백색 장석과 눈때문에 사시사철 하얀게 보인다.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백두산의 중국 이름인 장백산도 같은 뜻이라고 한다.  

내려오는 길에 발견된 지 얼마 안된 주정대협곡이라는 곳을 들린다. 거칠은 화산재들이 그대로 들어나 있는 계곡이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낙타와 똑 닮은 바위도 보인다. 이렇게 백두산 답사를 마치고 통화시를 거쳐 단동으로 돌아간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단동의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記念館)이다. 중국이 6.25 전쟁에 참여한 것을 기록한 기념관인데, 이름에서 중국이 바라보는 6.25전쟁의 성격이 드러나 있다.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와준 전쟁' 이라는 것이다.


기념관 로비는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악수하는 동상이 장식한다.


김일성이 마오쩌둥에게 원조를 요청한 친필 편지도 보인다. .

사실 이 기념관을 구경하면서 당시 1950년 당시 중국의 입장이 궁금해졌다. 당시 미국은 2차대전에서 승리한 전세계 최강 국가. 중국은 국공내전 승리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지 1년된 신생국가. 기념관 안에 도표로도 정리해 놓았지만 두 나라는 모든 면에서 비교도 되지 않는 국력차이가 있었다.  국민소득, 자동차대수, 철강생산량 등 모든면에서 중국은 미국의 10/1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미국에 맞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신생 독립국인 중국의 존립 근거조차 허물어 질 수 있는 중차 대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참전을 결정한다. 물론 단순히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순수한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북한이 허물어졌을 때 중국은 북쪽의 북한부터 프랑스 영향하에 있는 남쪽 베트남까지 서방세계에 포위되는 형국이 된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너무 시린 것이다. 이런 위기 의식이 중국의 전쟁 참여를 이끌어 낸 것으로 보인다.

이 전쟁 참여는 다른 면에서 중국 현대사에 커다란 여행을 끼치고 있다.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이 전사한 것이다. 가정이기는 하지만 마오쩌둥 사후 마오안잉이 살아 있었다면 그 권력은 누구에게 넘어 갔을 까? 과연 덩샤오핑으로 권력이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역사의 가정은 아무 의미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중국 백두산 여행을 마무리하게 된다. 중국여행의 특징인 장거리 이동, 불친절, 온갖 더위 다 겪으며 지낸 8일이지만 나름 의미 있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