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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아프리카 남부 여행 - 7. 빅토리아 폭포

스페어타이어를 구하기 위해 렌터카 회사에 연락을 한다. 에토샤 국립공원 남쪽에 추메브라는 도시가 있으니 그쪽으로 가라고 얘기해 준다. 그리고 우리의 렌터카는 기본적인 보험밖에 없기 때문에 스페어타이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당연스레 얘기한다. 일단 알았다고 대답한다. 미리 점검한 사항이기에 나중에 보험사에 확인하면 될 일이다. 물론 이후에 추가적인 비용부담은 없었다. 

추메브 시가지 - 인구 4만의 도시이다.

 추메브 도착 타이어 가계를 찾아간다. 종업원이 친절하게 맞아준다. 타이어 규격을 살피고 한참을 검색하더니 같은 타이어가 없다고 얘기한다. 다른 타이어 가계를 물으니 잠시 고민, 따라오라며 앞장을 선다. 두 번째 가계에도 같은 규격을 타이어가 없다고 한다. 이런... 타이어 규격을 확인해 본니 245/55/19라고 쓰여 있다. 검색해 보니 타이어 폭이 245mm, 편평비가 55 타이어 지름이 19인치라는 얘기다. 다른 타이어 가게가 있냐고 물으니 안내해주겠다고 한다. 옆자리에 태우고 다른 가게로 행한다. 이후 무려 10여 개의 타이어 가계를 들렸다. 그런데 전부 같은 규격의 타이어가 없다는 것이다. 이 조그만 도시에 타이어 가게가 10여 개나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같은 규격의 타이어가 없다는 것은 더더욱 놀라웠다. 어쩌나 고민을 하자, 안내해 주던 종업원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똑같은 타이어는 아닌데 255/55/19 타이어가 있다는 것이다. 타이어 폭이 다른 데 괜찮냐고 물어보니, 타이어 폭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생각해보니 타이어 지름만 같으면 폭은 그다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다른 대안이 없기도 했다. 
 
스페어타이어를 싣고 떠나면서 병훈 한마디 한다. '여기서 타이어 장사하면 대박 나겠는데^^' 비포장 도로가 대부분이니 타이어 펑크는 일상 다반사로 일어난다. 얘기가 좀 더 발전한다. 무역 컨테이너에 타이어가 몇 개 들어가고 어디로 수입해야 하는지, 나미비아 서해안으로 들어와야 하니 왈비스베이나 스바코프문트로 배가 들어오고 운송비용은 엄청 비싸고, 컨테이너 한 개 운송비용은 알마나 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얘기가 진전된다.
 
결국 병훈 한마디 한다. '진짜 할 거야?' '아니'   

빅토리아 폭포까지 국경을 3번 넘어야 한다.

빅토리아 폭포까지 1000km를 넘게 가야한다. 그나마 빅토리아폭포로 가는 B8 국도는 포장도로이다. 이 거리를 하루에 갈 수는 없어 중간에 하루를 묵기로 한다. 그런데 숙소가 여의치 않다. 숙소도 거의 없고 그나마 있는 숙소도 이미 예약 중이다.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디분두(Divundu)라는 도시에 숙소를 잡는다. 숙소 바로 앞에 조그만 강이 있다어 확인해 보니 오카방고 강이란다. 아프리카를 소개하던 TV에서 많이 나오던 강이라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다음날 오후 나미비아 - 보츠와나 국경에 도착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국경을 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특히 차량을 가지고 국경을 넘는 경우 비용과 서류가 복잡한 경우가 많다. 빅토리아 폭포까지는 국경 3개를 넘어야 한다. 나미비아에서 보츠와나로 다시 짐바브웨로 그리고 잠비아로, 그리고 렌터카 반납을 위해서는 역순으로 다시 돌아 나와야 한다. 보츠와나 국경에 도착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간단하게 국경을 통과한다. 이렇게 쉽게^^
 
몇 년전 투르키예 갔을 때이다. 렌터카를 타고 조지아로 가기로 한다. 흑해 연안을 따라 국경에 도착한다. 통관절차를 확인하니 차량에 운전사 한 명만 타고 나머지 일행은 걸어서 국경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두 명은 육로로 국경을 통과해 차량을 기다린다. 그런데 친구가 운전하는 차량이 넘어 오지 않는다. 확인해 보니 렌터카는 투르키예 - 조지아 국경을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다시 투르키예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조지아를 입국했다가 돌아온 필자는 운전을 했던 친구에게 한마디 한다.
'세상에 여행자는 조지아를 간 넘과 못 간 넘으로 나누어진다!' 

4개국의 국경이 만나는 카중굴라

빅토리아 폭포로 가다보면 잠베지강 쪽으로 카중굴라(Kazunggula)라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다. 이 마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4개 국가의 국경이 한 곳에서 만나는 곳이다. 사합점이라도 부르는 지구상에서 단 한 곳, 잠베지 강을 사이에 두고 잠비아와 보츠와나가 마주 보고 있으며 강 중간쯤으로 나미비아와 짐바브웨의 국경이 들어와 있다. 잠비아와 보츠와나를 연결하는 카중굴라 대교가 이 장소 바로 위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 카중굴라 대교는 아프리카 남부의 나미비아, 잠비아, 짐바브웨, 보츠와나 4개국의 40년 숙원사업이었다. 우리나라의 대우건설이 2020년 10월 완공하였다.

짐바브웨 세관

보츠와나 - 짐바브웨 국경 세관에 도착한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세관원의 설명이 길어지고 비용에 대해서도 구구절절이 덧붙이는 말이 많다. 보츠와나 입국 때 보다 훨씬 더 험난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결국 2시간 넘게 기다리고,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짐바브웨로 입국한다. 경제가 거의 파탄 상태인 짐바브웨에서 세관은 공무원들이 합법을 가장해 돈을 버는 유용한 수단일 것이다. 처음에 세관원이 애기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준 것을 확인한 병훈이 따지겠다고 한다. '아서라' 하며 이 정도도 양호한 것이라고 병훈을 말린다.  
 
짐바브웨, 한때는 아프리카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그 명예는 사라지고 오랫동안 모진 식민지배를 당한다. 1960년대 아프리카 독립의 기운이 왕성하던 때, 인구의 1%밖에 안 되는 백인들이 1964년 '로디지아'라는 이름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의 선언한다. 1964년 흑인정권으로 독립한 잠비아(북로디지아)와 달리  짐바브웨(남로디지아)는 자치 식민지로 머물다가 1980년에 와서야 독립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짐바브웨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던 소수의 백인들이 원래 주인인 흑인들로부터 독립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남아공의 백인정권이 1961년 대다수의 흑인들을 소외시킨 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아프르트헤이트라는 흑백 차별정책을 펼친 것과 똑같은 상황이 짐바브웨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현대 짐바브웨 역사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 있다. 한 때는 독립영웅이자 아프리카 해방의 아버지였으나 무지막지한 독재자로 변모해 37년간을 철권 통치한 로버트 무가베(1924 - 2019). 무가베는 애초부터 문제가 많았던 이디 아민과 달리 기대가 많았던 인물이다. 짐바브웨가 독립할 때만 해도 무가베는 남아공의 넬슨만델라에 견줄만한 독립영웅이자 해방자로 추앙받았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무가베는 남아공의 포트헤어 대학을 나와 교사 생활을 하다 게릴라 투쟁에 나선다. 인구의 78%를 차지하는 쇼나족 출신인 무가베는 1970년대 아프리카민족동맹(ZANU)을 이끌고 독립의 쟁취한다. 독립 이후에도 초기 흑백 공존 정책으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어,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성공사례였다. 그러나 무가베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떠나야 할 때 떠나지 않았다. 권력욕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93세까지 무려 37년 간 짐바브웨를 철권통치하며 짐바브웨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런데 짐바브웨의 비극은 무가베의 몰락에서 끝나지 않았다. 또 다른 독재자가 나타난 것이다. 음낭가과는 무가베 정권의 이인자로 권력의 단맛을 누리다 2017년 추방당하자 쿠데타로 무가베를 축출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며 지금까지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다. 그들은 한때 아프리카의 곡창지대로 블리던 풍요의 땅을 세계최고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민생지옥으로 만들었다. 1000%가 넘는 세계최고의 인플레, 인구의 3분의 1 이상 식량부족, 국민의 80%가 실업상태, 평균수명 43세의 경제 성적표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짐바브웨의 화폐는 돈으로서가 아니라 50억, 100억 달라라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숫자가 쓰인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다.    

세관 앞을 지나가는 사자

세관을 나오는데 사자 몇 마리가 차 앞을 지나간다. 응? 여기는 국립공원도 아니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인데.... 사자는 잠베지 강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건기에 물이 부족한 동물들이 잠베지 강으로 이동하자 사자도 그 동물들을 따라 잠베지 강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 아프리카지. 그래도 세관 앞에서 사자를 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빅토리아 폭포 전경 - 나무위키 인용

빅토리아 폭포에 도착한다. 잠비아와 짐바브웨 사이의 잠배지강에 있는 폭포다. 흔히 나이아가라 폭포, 이과수 폭포와 함께 세계 3대 폭포로 불린다. 영국의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 - 1873)은 1885년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이 폭포를 찾았고, 당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라 빅토리아 폭포라고 명명한다. 에베레스트가 초모랑마라는 원래의 이름이 있듯이 빅토리아 폭포도 로지어(Lozi)어로 "모시 오아 툰야(Mosi-oa-Tunya)"라는 이름이 있었다. "천둥 치는 연기"라는 뜻이다. 빅토리아 폭포의 물보라는 300m 이상 튀어 오르며 50km 밖에서 물안개를 볼 수 있으며, 굉음은 몇 km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 따라서 하얀 연기가 천둥소리를 낸다는 아프리카인들의 표현만큼 빅토리아 폭포를 잘 묘사한 말은 없다. 지금도 현지에서는 영국인들이 식민지 시절에 지은 이름이라며 이름을 바꾸자고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빅토리아 폭포라는 이름이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아 이런 주장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지는 않는 둣하다.  

빅토리아 폭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폭포로, 물이 떨어지는 틈새의 깊이는 최저 80m, 최고 108m에 달하는 거대한 물막을 형성한다. 강물의 폭 전체가 한 번에 쭉 떨어지는 형태로 되어 있으며 그 폭은 1,708m에 이른다. 빅토리아 폭포는 산이라든가 계곡이라든가 하는 험준한 지형이 없이 사방 수백 km가 평지가 계속되는 지형이다. 강물이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기보다는, 깊숙이 파인 틈새로 들어가는 모양새다.

8월의 빅토리아 폭포

폭포의 수량은 계절에 따라 크게 변하는데, 특히 우기인 4월에 절정에 이르며, 그때는 1분에 5억 리터 이상의 물이 폭포를 따라 떨어진다. 반면 10월부터 11월의 건기에는 수량이 급격히 줄어들어 일부 구간에서는 물이 거의 흐르지 않으며, 이 시기에는 바닥을 걸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도 가능하다. 이러한 건조 시기에는 폭포의 절벽과 그 아래에 형성된 협곡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그 자체로도 감동적인 풍경을 제공한다.
 
빅토리아 폭포가 다른 폭포에 비해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폭포는 979m의 높이를 자랑하는 베네수엘라의 앙헬폭포이다. 그리고 가장 넓은 폭포는 너비 2.7km에 달하는 이과수 폭포이다. 연평균 수량은 나이아가라 폭포가 가장 많다. 빅토리아 폭포가 유명해진 것은, 규모가 1위 여서가 아니라 폭포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특히 빅토리아 폭포에 보름달이 뜨면 하늘에 달무지개가 걸리는 환상적인 풍광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달무지개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풍광이라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가만히 날짜를 계산해 본다. 애고 보름은 아직 멀었네.....
 
폭포 주변 하늘은 온통 물안개이다. 잠베지강의 물이 아래쪽 바위벽 부딪치면서 300m까지 치솟는다. 그래서 누구든 폭포가 눈에 보이는 순간부터 온몸이 흠뻑 젖는다. 빅토리아 폭포의 물안개 기둥이 높이 치솟는 이유는 특수한 지형 때문이다. 폭포는 위쪽 절벽과 높이가 같은 아래쪽 절벽 사이로 떨어진다. 즉 폭포의 상류와 하류가 계곡을 사이에 두고 같은 높이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다른 폭포처럼 넓은 웅덩이로 떨어져 바로 평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 계곡으로 떨어진 물이 아래쪽 절벽에 부딪혀 다시 하늘로 치솟는 것이다. 여러 줄기로 내려오는 빅토리아 폭포의 작은 폭포들은 특성과 모양에 따라 '악마의 폭포' '중심폭포' '말발굽폭포' '무지개폭포' '안락의자폭포' '동쪽폭포' 등으로 불린다. 

리빙스턴 동상

짐바브웨 빅토리아 폭포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리빙스턴 동상이 관광객을 맞이한다. 1885년 앙골라에서 잠배지강을 따라 내려오던 리빙스턴은 빅토리아 폭포를 처음보고 ' 거대한 물안개 기둥이 구름이 닿아 있는 듯했다'라고 외치며 감탄한다. 그러나 이 순간은 아프리카를 인도양에서 대서양까지 뱃길로 연결하는 '하늘님의 고속도로 (God's Highway)'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꿈이 좌절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잠베지 강의 뱃길을 빅토리아 폭포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리빙스턴은 스코틀랜드 블랜타이어의 가난한 방직공의 아들로 태어난 의사이자 선교사로 아프리카 내륙까지 탐험한 인물이다. 리빙스턴은 10살 때부터 방직공장에서 하루에 14시간씩 일하며 밤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했다. 1836년 글래스고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840년 런던 선교회에 의해 남아프리카에 파견되면서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리빙스턴은 선교뿐 아니라 탐험에도 관심이 많았다. 소규모 탐험대의 측량사이자 과학자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1849년 8월 1일 응가미호(湖) 발견을 도운 공로로 영국왕립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과 상금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리빙스턴은 평생 이 학회와 관계를 가졌다. 학회는 줄곧 탐험가로서의 리빙스턴의 야망을 격려했고 영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활동하도록 지원했다.
 
1855년 11월 17일 잠베지 강을 따라 내려왔을 때, 강에는 뇌성이 울리고 연기가 자욱했는데 이는 아프리카 탐험 중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찾은 가장 볼 만한 장관이었다. 이곳에는 폭포가 있었고, 애국심이 투철했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이를 여왕의 이름을 따 빅토리아 폭포라고 명명했다.
 
1856년 12월 9일 리빙스턴은 국가의 영웅으로 추대되어 영국으로 돌아왔다. 리빙스턴이 돌아오기 전 3년 동안 그가 전한 탐험과 모험에 대한 소식들은 모든 지역 영어권 주민들의 상상을 자극했다. 빅토리아 폭포의 발견으로 유명세를 얻은 리빙스턴은 1858 -1864년 영국정부의 공식후원을 받아 잠베지강 탐험대를 이끌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의 활동은 개인의 선교나 탐험이 아닌 영국의 국가적인 사업이 되어버렸다. 

리빙스턴

리빙스턴은 자신이 이룩한 성과들을 세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은 (남아프리카에서의 선교여행과 조사 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1857)라는 책으로 출간된 뒤 7만 부 이상 팔린다. 또한 그의 탐험일지는 영국정부와 상인들에게 귀중한 정보가 되었고,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다.  
 
신의 진리로 미개한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던 지난 세기 수많은 유럽 선교사들이 결국 제국주의 수탈의 전위로 기능했던 것처럼 리빙스턴 삶도 선악의 경계 위에 있었다. 그는 1841년과 49년, 56년 세 차례 아프리카 각지를 선구적으로 탐험하며 ‘복음’을 전했고, 의료봉사로 도움을 주고 노예제를 혐오해 노예제 폐지를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책은 아프리카 식민화의 안내서로 널리 읽혔다.

리빙스턴 묘 - 웨스트민스트 사원 (다음백과)

 리빙스턴은 1865년 왕명으로 나일강 원류 탐험에 나섰다가 실종된다. 스타 탐험가의 생사를 확인-보도하기 위해 미국 ‘뉴욕헤럴드’란 매체가 1871년 3월 21일 대규모 탐사대를 파견한다. 그해 7월 탕가니카 호수 인근의 한 마을에서 병든 그를 발견, 리빙스턴의 생존을 서구 사회에 알렸다. 이것은 아프리카나 아마존 원주민 부락에서 잃어버린 백인을 만나는 영화 속 에피소드들의 원조처럼 보였다. 리빙스턴은 치료 후 세상의 열광을 뒤로하고 탐험을 이어가다 18개월 뒤 오늘날 잠비아에서 말라리아와 이질로 숨졌다. 그의 시신은 그의 충실한 하인이자 친구인 추마와 수시에 의해  방부 처리되어 고국으로 운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된다.

 

30년간 아프리카 전역에서 펼친 리빙스턴의 탐험과 선교활동은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의 태도에 전례 없이 큰 영향을 주었다. 리빙스턴이 탐험한 지역은 유럽인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전통사회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아프리카가 근대사회로 발전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믿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빙스턴은 유럽 제국주의 선구자일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민족주의에서도 선구자였다. 결국 리빙스턴은 용기 있는 탐험가로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반대한 인도주의자였고 말라리아와 이질에 시달리면서 30년을 아프리카에 머물며 그 땅을 사랑한  인물이었다. 그는 영국이 아프리카에 진출하는 것은 돈벌이가 아니라 현지 노예무역을 근절하고 현지인들을 기독교 문명화하는 숭고한 사명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즉 '합법적인 상업무역이 노예무역을 몰아낼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한편으로 영국 상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장사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활동은 서구중심중의적 사고에 기반해 있으며 아프리카를 기독교 문명화의 대상으로 보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의 전통문화와 종교를 미신으로 보았으며, 그의 탐험자료들이 후에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 확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빅토리아 폭포 철교

빅토리아 폭포에는 짐바브웨와 잠비아를 연결하는 빅토리아 폭포 철교가 만들어져 있다. 빅토리아 폭포 철교는 영국의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총독이었던 존 세실 로드(John Cecil Rhodes)가 1904년부터 1905년 사이에 케이프 타운에서 카이로까지 연결하려는 철도 사업의 일부로 건설하였다. 이 철교는 런던의 Duglas Fox & Partener라는 회사의 조지 홉슨(Gorge Hopson)이 설계하고 Cleverland Bredge Company에 의해 건설되었다. 철교의 길이는 198m로 해발 128m 지점에 있다. 1905년 9월 12일 공식개통식에는 찰스 다윈의 손자 조지 다윈이 개통 테이프를 끊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철교 건설을 두고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조지 홉슨의 설계로 철교 건설이 시작되었다. 아치교인 관계로 양쪽부터 철근을 연결해 나간다. 공사 막바지에 양쪽 다리를 연결하려고 보니 문제가 생겼다. 30cm가 짧았던 것이다. 다리가 실재 폭보다 30cn 짧게 설계되었던 것이다. 결국 설계를 변경해 간신히 다리를 연결하고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리의 설계자 조지 홉슨은 이를 비관해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악마의 수영장(트립어드바이저)

잠비아 쪽 빅토리아 폭포 끝에는 악마의 수영장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폭포 제일 끝에 웅덩이가 있어 풀장처럼 입수가 가능한 곳이다. 폭포 끝 쪽으로 바위 벽이 있어서 사람들이 더 이상 떠내려 가지 않도록 막아준다. 보이는 모습과 달리 실제로는 그리 위험하지 않다. 건기에는 유속이 빠르지 않아 잠비아 쪽 리빙스턴 섬을 통해 헤엄쳐서 접근할 수 있다. 이곳은 인공적으로 건설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성된 곳이다. 현지 가이드들은 한술 더 떠서 폭포 끝의 바위벽을 걸어 다니며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준다. 이미 인터넷에서는 유명한 사진 맛집^^으로 소문이 나 있다. 자극적인 영상을 찍으려 하는 유투버들에게는 이미 성지로 통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천 시 등 기상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출입이 금지되며, 수위가 비교적 낮아지고 물의 흐름이 빠르지 않은 8~10월 사이에만 개방된다.
 
병훈에게 한마디 한다. '들어가 보자'
병훈 한마디 한다. '혼자 가슈'
'이런.....'

리빙스턴시

빅토리아 폭포는 남부 잠비아와 짐바브웨의 국경을 이루며 인도양으로 흘러가는 잠베지강 중류에 있다. 빅토리아 폭포에서 떨어진 잠베지강의 물은 계곡을 따라 흐르면서 동쪽의 잠비아와 서쪽의 짐바브웨로 나뉜다. 잠베지강을 경계로 짐바브웨 쪽 도시는 빅토리아폭포시, 잠비아 쪽 도시는 리빙스턴시다. 짐바브웨 국경을 넘어 리빙스턴시를 가기로 한다. 걸어갈 수 있는 도시인가 했더니 빅토리아 폭포에서 10km 정도의 거리란다. 결국 국경에서 택시롤 타고 리빙스턴시로 향한다. 
 
관광도시인 리빙스턴은 탐험가 리빙스턴을 기려 이름 지은 도시다. 관광지답게 숙소도 많고 외국계 은행도 많아 관광객에게 편리한 도시이다. 리빙스턴은 1935년 루카사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잠비아 식민지 수도였다. 잠비아라는 국명은 잠베지 강에서 따온 것이다. 잠비아 화폐는 말라위와 같은 콰차를 통화단위로 사용한다. 과차(Kwacha)는 아프리카 반투어로 '새벽'이라는 뜻인데, 잠비아와 말라위의 민족주의자들이 독립구호로 사용하면서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게 되었고 독립국의 화폐단위까지 되었다. 잠비아가 짐바브웨보다 일찍 독립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의식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잠비아 독립을 이끌었던 초대 대통령 케네스 마운다(Kenneth Kaunda)는 교사 출신으로 시민불복종 운동을 조직해 이름도 멋진 차차차(ChaChaCha)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마르크스주의와 아프리카 전통적인 공동체 정신을 결합한 '잠비아휴머니즘' 운동을 펼쳤다. 마운다처럼 아프리카에는 유난히 교사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식민지 시대 아프리카 중산층 자녀들이 진출할 수 있는 지적 분야는 주로 교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마운다는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자, 스스로 다당제를 복원을 선언한 뒤 1991년 대통령 선거를 치렀고, 야당후보에게 지자 깨끗이 물러났다. 짐바브웨의 무가베와는 다른 선택이었다.   

잠베지 강의 일몰

귀경한 빅토리아 폭포시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잠베지강의 선셋 투어이다. 투어보트는 간단한 식사와 와인을 제공해 준다. 한 모금의 와인을 마시며 아름다운 잠베지강의 풍광에 빠져든다. 아프리카 남부 여행도 이제 막바지이다. 황홀한 일몰을 보면서 40여 일간의 아프리카 여행을 정리해 본다. 끝으로 남아프리카 여행에 많은 편의와 도움을 주신 매형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혼자였으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 동반자가 되어준 병훈이 있었기에 큰 무리 없이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통해 후배 병훈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