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9 일 12일간 인도 중부를 다녀왔다. 12일간의 짧은 일정으로 고심 끝에 인도 중부를 가보기로 한다. 무엇보다 아잔타석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불교 미술의 보고, 돈황의 막고굴을 비롯한 중국의 3대 석굴과 경주의 석굴암도 본 필자의 입장에서 아잔타 석굴은 꼭 가야만하는 숙제처럼 남아있는 곳이었다. 12일은 아잔타, 엘로라 석굴과, 함피, 고아 등 3곳을 들리기에도 벅찬일정이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인도 국내선 비행기로 델리, 하이데라바드, 뭄바이 같은 대도시를 이동하기로 한다.

인도는 광활한 영토와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2023년 기준으로 인구는 14억으로 세계 1위의 국가 되었다. 같은 나라였다가 독립한 파키스탄, 방그라데시를 포함하면 무려 18억명의 인구이다. 한반도의 15배에 달하는 영토와 수 많은 언어가 존재한다. 공용어로 인정하는 주요 언어만 해도 15개이며 많게는 1600개가 넘는 언어가 존재한다. 힌디어와 영어가 제1,제2 공용어로 쓰이며 법류상의 공용어는 영어를 사용한다. 종교의 나라라는 별칭답게 힌두교와 불교, 자아나교, 시크교의 발상지이며 수세기에 걸친 이슬람 왕조와 영국의 지배로 이슬람교와 기독교도들도 존재한다. 인구구성은 힌두교 85%, 이슬람교 12%, 시크교 3%, 기독교 2%, 불교 1% 등의 분포를 지니며 사회적 통합을 위해 종교세속주의 원칙을 가지고 있으며 헌법에도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다.
인도는 다양한 종교와 더불어 심한 빈부격차와 높은 문맹율, 사회적인 신분제도 등이 남아있는 복합적인 사회이다. 특히 카스트 제도는 법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인도인의 생활 저변에 깔려있는 독특한 신분제도이다. 그 근원은 역사적으로 아리안족이 인도에 침입해 정복한한 후 원주민과의 차등을 강조한데 유래한 것으로 아직도 인도 사회에 막강한 영행력을 행사하고 있다. 카스트 제도는 차차로 이야기해보자.

델리를 거쳐 아우랑가바드로 행한다. 도시 자체 보다는 아잔타, 엘로라로 향하는 관문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들리는 곳이다. 원래이름은 암석지대를 뜻하는 카드키였으나 무굴제국의 6대황제 아우랑제브가 데칸지방 태수로 부임하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아우랑가바드로 블리게 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자 샤자한과 함께 그 유명한 타지마할의 주인공이다^^ 아잔타 석굴은 아우랑가바드에서 100km 정도, 차로 3시간 넘게 걸린다. 100km 에 뭔 3시간이나 걸리냐고 했더니 그것도 많이 빨라진 것이란다. 이전에는 5,6시간은 기본이었다고. 땅 떵어리 큰 나리를 돌아다닐 때는 다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3시간을 달려 아잔타 석굴 입구에 다다른다. 여기부터는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가격도 이전에 비해 많이 올랐다고 하느데 버스는 그대로다. 30년도 넘어 보이는 버스인데 타보면 운전대와 기어 악세레다가 뼈대처럼 다 나와 있다. 그래도 4km 정도의 언덕길을 쉬지 않고 올라 석굴입구에 도착한다.

아잔타는 아우랑가바드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데칸고원의 끝자락에 존재하는 작은 마을이다. 예전에는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번창한 도시였으나 지금은 관광객이 아니면 찾지 않는 시골마을이다. 아잔타 석굴은 1819년 인도 주둔 영국군인 존 스미스 일행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맹고나무 숲에 덮여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호랑이 사냥을 하는 도중 눈앞에서 사라진 호랑이를 찾다가 건너편 바위 쪽으로 총을 쏘았고, 총알이 어디론가 들어가 공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절벽 안쪽으로 동굴이 있음을 직감하고 탐색하던 끝에 석굴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아잔타 석굴은 총길이 1.5km의 말발굽 형태로 와고라 강이 흐르는 70m의 절벽에 자리잡고 있다.
BC 1,2 세기 경부터 사원이 조성되기 시작해 7C 중반까지 900년에 결쳐서 29개의 석굴이 조성되었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불교를 신봉하던 아소카왕으로 유명한 마우리아 왕조와 쿠샨왕조가 쇠퇴하면서 4C 이후 굽타왕조를 비롯한 여러 힌두 왕조가 등장한다. 그런데 어떻게 아잔타 석굴은 7C 중반까지 조성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초기 힌두 왕조의 후원자들이 굳이 힌두교와 불교를 구분하지 않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데칸고원을 지나는 수많은 상인들의 불심과 시주에 의해 사원은 오랫동안 번창했다. 그들 가운데는 인도인 이외에도 중앙아시아나 중국 등에서 온 헌신적인 시주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조성된 29개의 석굴은 1819년 이후 피어슨 로달과 수많은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1893년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아잔타는 현재 13개 정도의 석굴에 벽화가 남아 있는데, 이 벽화는 고대 인도 불교미술의 최고 걸작이며, 인도 회화의 오래된 역사가 담겨있고 아시아 회화사에서도 중요한 미술사적 자료의 산실이다. 또한 시기적로도 전성기부터 쇠퇴기까지를 다 아우르고 있고, 초기 소승불교와 후기 대승불교 모두를 담아내고 있다.

불교석굴사원은 크게 차이티야(chaitya)와 비하라(vihara)의 두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차이티야는 예불을 위한 공간으로 둥근천장과 불법을 상징하는 탑이 중앙에 자리한다. 비하라는 승려들이 기거하는 승방으로 모임을 위한 넓은 중앙홀과 입구를 제외한 삼면에는 작은방들이 있다.

아잔타 석굴의 조성 초기인 기원전 2C 는 힌두교를 믿는 사타바하나 왕조 시대였으나, 불교에 배타적이기보다는 시주와 우호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정치적 안정과 더불어 주변나라들과 무역이 성행했으며, 그로 인해 축척된 부는 사원의 시주와 봉헌으로 이어지고 승려들은 적극적으로 조각과 벽화제작을 후원하여 그들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기회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인도에는 천여개가 넘는 불교 석굴사원이 있고, 그 가운데 700여 개의 사원이 아잔타 석굴이 있는 마하라슈트라주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 석굴사원이 무역의 통로를 따라 조성된 것으로 보아 아마 사원은 상인들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을 것이고, 부를 축척한 상인은 무역이 잘 이루어지도록 기원하며 불심에서 우러난 시주를 하고 그것이 석굴조성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초기 아잔타 석굴의 조성 시대에는 소승불교의 시기로 부처의 모습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을 금했다. 그래서 부처는 불기둥, 보리수나무, 스투파 등 상징으로 경배되었고, 자이티야(예불 법당)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스투파는 원래 부처님의 사리를 넣기 위한 반구형의 무덤양식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그 사리가 8개의 나라로 나누어져 탑파를 쌓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2~3세기 무렵에는 인도 아소카 왕이 8만 4,000개의 스투파를 만들었다고 한다. 스투파는 그후 무덤이 아니라 부처의 사리를 안치하는 성스러운 구조물로서 불교의 전파와 함께 각 지역에 세워졌는데 나라와 시대에 따라 그 의미와 양식이 다르다. 아잔타 석굴에서도 부처상이 없고 스투파가 있는 것은 초기에 조성된 석굴로 보고 있다.
탑돌이의 원형으로 보이는 스투파 숭배는 흔히 해의 진행방향(pradakṣiṇā)을 따라 탑을 돌면서 걸어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스투파는 다른 건물 안에 세워지더라도 언제나 독립된 기념물로 간주된다.
아잔타석굴에서 조각만큼 중요한 것이 벽화이다. 900년이라는 세월에 절쳐 조성된 만큼 인도 회화의 다양한 변천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 양식의 변화를 대략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제1기는 기원전 1, 2C 에서 3C경, 제2기는 5,6C경, 제3기는 7C 로 나눌 수 있다. 제2기가 아잔타 불화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으며 다양한 이야기들이 묘사되었다
그런데 벽화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림을 감상해야 하는지 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야기의 주제가 아래부터 시작되어 위쪽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그 반대로 전개되기도 하고, 왼쪽에서 시작되어 오른쪽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거기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다. 그래서 감상자가 이야기의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면 그림의 흐름을 알아차리기 어려워진다. 벽화를 그린 화가는 부처의 전생 이야기를 통해 불교도들을 교화하려는 생각보다는 석굴의 주어진 화면을 종휭무진 누비며 자유롭게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종교화가로서의 기능은 부수적이고, 화면을 마음대로 누비는 예술가 특유의 열정과 몰입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17번 석굴의 벽화를 보자. 부처가 그의 고향 카피라바투스로 돌아와 왕궁의 입구에서 아내와 아들을 만난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 아내와 아들 앞에 나타난 부처가 붉은 가사장삼을 걸치고 자애와 연민이 넘치는 모습으로 탁발 그릇을 들고 서 있다. 부처는 야쇼다라와 라훌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묘사되어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부처의 얼굴은 고개를 내려뜨린 측면에 가깝지만 신체는 거의 정면형이다. 입체감을 느낄 만한 근육에 대한 표현은 없지만, 희미한 색체의 음영이 부처를 더욱 성스러워 보이게 한다. 아쇼다라는 아들 라훌라에게 어서 아버지에게 왕자로 태어나 지켜야 할 올바른 삶의 방식을 물으라고 재촉하나, 부처는 그저 자신은 손에 든 탁발 사발밖에 없다고 말한다. 한때 사랑했던 아내와 아들 앞에 산처럼 높고 커다란 존재로 묘사된 부처의 모습은 불교의 무심의 의미를 이해하게 한다.
아잔타 석굴에 그려진 벽화의 주제는 자타카(탄생의 의미)이다. 자타카는 기원전 4세기에 쓰여진 547편으로 구성된 부처의 전생이야기이다. 즉 부처가 싯다르타 왕자로 태어나기 이전생에 관한 이야기다. 힌두에서도 많이 볼 수 있고 인도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부처가 인간의 모습, 반인반수, 때로는 동물의 모습 등으로 태어나서 실천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부처가 보살로 태어난 수많은 전생동안 실천한 자비와 미덕이 결국 깨달음을 얻은 석가족의 왕자 싯다르타로 태어나게 했다는 내용이다. 아잔타 석굴에 그려진 벽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주요 석굴에 묘사된 다양한 자타카(부처의 전생)의 내용을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의 모습까지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벽화에 묘사된 자타카(부처의 전생)를 통해 아주 오래전 부처의 전생 행적을 따라다니는 설레는 구도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아잔타 석굴에는 모두 25편의 자타카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그중 16편의 자타카가 그림상태가 우수하다.

17번 석굴의 비스반타라 자타카를 보자
한번은 부처가 제튜타라 왕국의 왕자 비스반타라로 태어난 적이 있다. 어느해 이웃 카링가 왕국에 비한방울 내리지 않고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도 있었다. 이에 성품이 자비로운 비스반타라는 자신의 왕국에 풍족한 비를 내리게 하는 신성한 힘의 코끼리를 카링가 왕국으로 보내 비를 축원하게 했다. 그러자 제튜타라 왕국의 백성들은 화가 나 왕에게 왕자를 추방하라고 아우성을 쳤고,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여 왕도 어쩔 수 없이 왕자를 추방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왕국을 떠나기전 왕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심지어 자신이 타고 가야 할 마차와 말까지도 필요한 이들에게 주었다. 이런 상황을 하늘에서 보던 신들은 왕자의 관대함을 시험하기 위해 욕심 많은 브라만 승려 쥬쥬라카를 왕자에게 보낸다. 쥬쥬라카는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은 늙고 병들어 시중들 사람이 필요하니 왕자의 두아들을 자신의 몸종으로 내어줄 것을 청한다. 왕자는 주저하지 않고 사랑하는 두아들을 기꺼이 데리고 가도록 허락하였다. 쥬쥬라카는 두아이에게 혹독하게 일을 시키며 때로는 매질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들의 신분을 알아차린 한 남자가 쥬쥬라카를 설득해 왕을 손자들을 왕국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왕은 몹시 기뻐 아이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승려가 원하는 몸값을 지불하였다. 시간이 흐른 뒤 백성들은 왕자의 자애로운 마음과 관대함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왕자에게 용서를 구하며 다시 돌아와 줄 것을 간청하였다. 마침내 왕자는 다시 왕국으로 돌아오고 온나라는 그들을 환영하는 성대한 잔치를 벌인다.
가장 소중한 것을 보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공덕을 쌓는 일이다. 이처럼 부처는 수많은 전생의 공덕을 쌓은 후에야 싯다르타 왕자로 태어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잔타 석굴의 천장은 대부분 식물과 꽃문양으로 장식하고 있다. 아잔타 석굴의 안료는 대부분 돌가루 같은 천연재료들을 사용하였는데 그런데 마치 어제 그린듯 유난히 선명한 색을 자랑하는 꽃들이 보인다.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코끼리 상아를 가루내어 안료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2000년이 지났지만 너무나 선명하게 빛을 바라는 연꽃이다. 석굴의 내부는 석굴 아래쪽을 흐르는 와고라 강을 가득메운 강렬한 햇살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어둡고 고요하다. 석굴 내부에 조각된 형상과 벽화들을 제대로 보려면 잠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곧바로 수많은 부처와 보살들, 왕과 성자들, 매혹적인 궁권의 여인들, 무희와 악사들, 연꽃 향기 가득한 연못, 동물들의 재빠른 움직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 움직이는 한편의 거대한 드라마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아잔타 회화와 조각의 전성기는 4,5C이다. 250년경 설립된 바카타카스 왕조는 300년 넘게 통치했고, 이 기간동안 아잔타 미술은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아잔타 석굴은 굳이 불교의 신념을 떠올리기 이전에 인간의 신심과 섬세함에 할말을 잃게 만든다. 또한 사원조성을 위한 헌신과 인내심 앞에서는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진정 인도미술의 정수를 들여다보기를 원한다면 아잔타에서 시작해 엘로라에서 끝나면 된다.

건너편 전망대에 올라 아잔타 석굴을 바라본다. 70m높이의 절벽 중간에 석굴을 조성해 놓았다. 불현듯 한가지 의문이 든다. 어떻게 이런 석굴이 1000년 간이나 발견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와고라 강의 범람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강은 우기에는 늘 범람한다. 그것도 몇 년에 한번은 크게, 석굴내부에도 강이 범람해 물이 찼던 흔적이 보인다. 강이 범람하면 뻘과 진흙을 쌓아놓는다. 그곳에 풀과 잡초가 자라기 시작한다. 시간이 갈수록 무성해지며 퇴적토의 풍성함은 맹고나무까지 자라게 만든다. 안팍으로 자란 풀과 맹고나무는 무성한 덩굴을 만들어 석굴을 완전히 덮어버린다. 이 석굴이 1813년 존 스미스에 의해 발견된 후 1893년 세상에 공개된다. 그러나 뻘과 진흙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보호되던 벽화는 산소에 노출되며 급격하게 휘손되기 시작한다. 이제라도 이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산에 대한 종합적인 보호 대책이 나와야 할 것이다.

엘로라로 향한다. 엘로라는 아우랑 가바드 북서 20km 지점의 바위산에 조성된 34개의 석굴이다. 불교 미술의 보고인 아잔타 석굴과는 달리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유적이 혼재해 있다. 6C부터 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조성되었으며 시배별로는 불교, 힌두교,자이나교 순이다. 여러 종교의 석굴이 한 장소에 공존하는 것으로 보아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 오랜기간 동안 여러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16번굴의 카일라스 신전은 엘로라 석굴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8C부터 10C까지 150여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산을 통째로 깍아 만든 조각품이다. 한덩어리 바위를 이용한 조각품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평가를 받는다. 카일라스 산을 거대하게 재현해 내려고 하나의 돌덩이를 조각했다. 카일라스는 시바가 살고 있다는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히말라야의 산이름이다.

절벽에 세 개의 거대한 홈을 파 놓은 후 사원의 모양을 조각해 나갔는데, 2십만톤이 넘는 바위를 제거했다고 전해진다. 높이 35m 너비 45m, 깊이 90m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2배정도 크기이다. 전형적인 남인도의 드라비다 건축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안에는 시바의 다양한 모습과 여러 힌두신들을 비롯한 다량의 훌륭한 조각들이 있다. 그 수많은 조각과 건축물이 존재하는 인도에서도 가장 놀라운 작품 중에 하나임이 틀림없다. .

신전에는 인도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구조의 신들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그중에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이야기도 조각되어 있다. 스리랑카의 왕 라바나가 카일라스 산을 뽑아버리려고 하자 시바신이 발가락 하나로 그를 제압했나는 것이다.

카일라스 신전은 좌우가 완변한 대칭을 이룬다. 하나의 바위로 신전과 기둥, 부조 조각들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내었다. 조그만 실수도 되돌릴 수없는 바위 위의 조각이 무려 150년간이나 이어졌다. 화산암을 나무깍듯이, 아니 두부 깍듯이 깍아 이 수많은 건물과 기둥, 조각들을 만들어 냈다. 인도 카스트 특성상 몇대에 걸친 석공들이 대대로 이 작업을 이어갔을 것이다. 석공들은 오직 뭉뚱한 망치와 표족한 끌만을 가지고 이 경이적인 신전을 만들어 놓았다. 그들의 신심과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카일라스 신전은 시바에게 바쳐진 사원이다. 시바는 힌두에서 브라마, 비슈누와 함께 3대 신으로 인도 전역에 가자 많은 신전에 모셔져 있다. 파괴의 신으로 알려졌는데 단순이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를 위한 파괴의 신이다. 인도인들은 크게 비슈누파와 시바파로 나뉠 정도로 인도인들이 좋아하는 신이다. 시바는 호랑이 가죽을 걸친 파란 피부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피부가 파란 이유는 우유의 바다에서 세상을 파괴하는 독이 나왔는데, 시바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이 독은 시바 자신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삼키지 않고 목에 걸려있다고 한다. 그래서 시바는 파랗게 질려 있다는 것이다^^ 링감은 시바의 생식기로 시바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시바사원에는 시바신 본모습보다 시바신을 상징하는 링감이 그를 대신해 숭배되는 경우가 많다.
힌두사원은 크게 유적으로 남아 있는 사원과 현재도 영업하는(?) 사원으로 나뉘다. 현재도 이용되는 사원은 사제들이 있으며 사원 가장 높은 탑에 주황색 깃발을 달아 놓는다. 카일라스 사원은 유적으로 남은 사원인데 그래도 몇몇 사람들이 시바신에게 꽃을 바치고 있다.

인도 어디를 가나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Which country?"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남자 여자 모두 이 질문 던진다. 그리고 한국인이라고 하면 그러지 않아도 호기심 많은 인도인들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달려든다. 인도에서도 Korea 는 마법의 단어가 되었다. 인도 여행 중간 중간에 한국어로 질문하는 인도인들도 만난다. 한국에 다녀왔냐고 하면은 대부분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배웠다고 대답한다. 가히 전세계적인 한류의 유행이다. 이제 한국은 전세계 젊은이들이 가장 궁금해하고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가 되었다. 김구선생이 '나의 소원'에서 비라던 문화 강국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비록 한국에서는 대통령 부인이 2200$ 명품 가방을 선물 받고 있지만 말이다.....

10호 굴은 비스바카르마(Visvakarma)로 알려졌다. 비스바카르마는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성취한 석굴 또는 신들의 건축으로 불리는 엘로라 유일의 불교 차이티야(예배당) 석굴이다. 회랑을 매우 아름답게 장식한 외관과 석굴 안에는 부처님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모신 스투파가 있다. 대승불교 이후에 만들어져 큰부처의 형상이 스투파 중앙에 조각되어 있다. 건축양식이 변하는 과도기라는 것을 알 수있다. 이 굴은 바위가 목재처럼 보이는 재료로 마무리 되어 있기 때문에 ‘목수의 동굴‘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석굴 입구의 기둥과 내부의 반원형 천장은 마치 목재를 이용해 지은 집처럼 대들보와 서까래 형태로 조각돼 있고,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중앙에 모셔져 있는 불탑과 부처님의 법신에 비춰 아름답고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석굴의 중심에는 설법하는 모습으로 앉아있는 4.5m의 불상이 있다. 엘로라석굴 가운데 훌륭한 차이티야석굴이며 인도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도 훌륭한 석굴로 평가된다.

32번 석굴은 인드라 사바(인드라의 회의장)라는 이름의 자이나교 석굴이다. 자이나교 석굴 사원중에서 가장 훌륭하며 자아나교의 신인 고마테슈바라가 야생동물에 불러싸인 상이 있다.
자이나교는 불교의 붓다와 동시대인이었던 바르다나마(Vardhamana)의 가르침에서 연유한 종교이자 철학이다. 고대 인도의 베다 브라마니즘에 대한 반동이자 개혁으로 발생하여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는 인도의 종교, 철학이다. 자이나교는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 대부분이 그렇듯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영혼의 해탈을 목표로 한다. 자이나교에 따르면, 영혼의 본래 상태는 완전한 믿음, 완전한 지식, 완전한 능력, 완전한 기쁨의 상태이다. 그런데 해탈하지 못한 영혼은 무지와 걱정을 원인으로 하여 형성된 카르마(업보)가 영혼과 결합되어 있어서 이러한 본래 상태를 가린다. 따라서 새로운 카르마(업보)의 유입을 차단하고 이미 들어온 카르마(업보)를 제거하면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자 이제 자이나교 바르다나마의 정기를 받아 카르마(업보)를 제거하고 비자야나가르 제국의 도시 함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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