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튀르키예 중부를 관통해 에스키쉐히르에 도착한다. 에스키쉐히르는 튀르키예 11번째로 큰 도시이자 산업도시로 알려진 에스키쉐히르의 주도이다. 지명은 오래된 도시 라는 뜻에서 유래하였고 십자군 전쟁 시기 도릴라이움 전투의 장으로 알려져 있다. 도릴라이움 전투는 1097년 1차 십자군전쟁의 서막을 알린 전쟁으로 십자군의 존재를 튀르키예 병사들에게 각인시킨 사건이다. 보애몽을 비롯해 고드푸르아, 보두앵 등 십자군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 등장했으며 사실상 유일한 성공담을 만들어낸 1차 십자군 전쟁의 서막이 열린 곳이다.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에 걸쳐 예루살렘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간헐적으로 발생한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이슬람 원정을 가리킨다. 200여년의 십자군 전쟁은 성지회복이라는 종교적 신념 이외에 교황권 강화, 왕권회복, 동방의 보물에 대한 세속적 욕심, 중세의 신분제, 원정비용을 조달을 위한 돈벌이 등 수 많은 이권과 욕망들이 결합해 만들어 놓은 사건이다. 십자군 원정은 이후 유럽의 정치 지형을 크게 흔들어 놓는다. 십자군 전쟁은 15 C 신대륙 발견에 따른 변화 만큼이나 중세의 정치 지향을 바꿔놓은 커다란 사건이었다.
가장 볼거리가 많다는 오둔파자르로 향한다. 오둔파자르는 에스키쉐흐르 올드시티에 위치하며 오스만 전통가옥이 잘 보전되어 있는 지역이다. 주요 관광지 답게 이쁘게 색도 칠해 놓아서 요즘 핫한 사진 맛집^^ 이라고 할 수 있다. 에스키쉐히르의 대표적 관광지이다
에스키쉐히르에 대해 알아보자
1289년에 오스만제국의 창건자인 오스만 1세가 점령하여 건국의 발판을 닦았다. 다만 이후로도 소도시로 남았다가. 1894년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 으로 유명한 베를린 - 바그다드 철도가 놓이며 본격적으로 도시화되었다. 튀르키예 독립전쟁 시에 파괴되었다가 전후 다시 재건되었다. 현재는 튀르키예의 주요 산업 도시 중 하나로, 1961년 튀르키예의 첫 국산 자동차인 데브림이 이곳의 튈롬사쉬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도시 동쪽의 시가지 40% 면적의 산업 단지에서는 자동차, 가전제품, 전투기 엔진 등을 생산한다.
시가지는 포르수크 강 양안에, 동서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에스키셰히르는 튀르키예의 대학 도시 중 하나다. 시내에는 고고학 박물관, 자동차 박물관, 오둔파자르 구역 등의 볼거리가 있다. 서북쪽 30km의 산지에 오스만 제국의 첫 수도였던 쇠위트가 있고, 도시 동북쪽에는 공군 기지가 있는데,냉전 시기 튀르키예 내의 첫 나토 공군 기지로써 군사적으로 중시되었다. 기후에 있어서는 해발 800m의 고지대에 위치하여 여름에도 35도 이하이고 겨울에는 영하 10도까지 내려가는데, 2007년 자매 결연을 맺은 한국의 도시 파주와 비슷한 기후대이다. 다만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 저녁에는 20도 안팍의 기온으로 매우 쾌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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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둔파자르는 20C 초 메흐메트 5세 때 행한 대규모 건축사업 중의 하나로 건설되었으니 그리 오래된 건축물들은 아니다. 그래도 오스만 전통양식이 살아 있는 집에 다양한 색을 입혀 놓아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걸어 다니기 좋은 거리이며 기념품을 파는 상점과 카페식당이 많다. 인근에 밀납박물관을 비롯한 많은 볼거리를 가지고 있다.
목걸이를 비롯한 기념품 몇가지를 구매한다. 여행다니며 무게와 짐 때문에 다양한 기념품을 사기는 어렵다. 그래도 소소한 악세사리는 몇개는 구매하는 것이 좋다. 한국에서 하고 다니기 힘든 반지며 목걸리에 전통 의상 같은 것들을 현지에서 많이 착용하고 다닌다. 관광객이라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하겠다^^ 요즘은 택배가 발달해 한국까지 물건을 배달해 준다는 상점들도 많아졌다. 많은 나라들이 요즘 이런 방식으로 판매하는데, 한국의 관광객들이 구매하는 물건은 천연 라텍스 매트레스나 카페트처럼 고가의 물건들도 많다. 한국에서 받아보면 그리 만족도가 크지도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얼마 전에는 고민 끝에 500만원을 주고 산 카페트가 지금은 강아지 집 현관에 놓여 있다며 하소연하는 여행객도 보았다ㅋㅋ
숙소밖이 왁짝지껄해 내다보니 골목에 알뜰시장이 열렸다. 물어보니 일주일에 한번 열리는 시장이라고 하는데 그 규모가 상당하다. 시내 중심가 골목을 통제하고 농산물 중심으로 장이 서는데, 그 길이가 어림잡아도 1km 도 넘어 보인다. 여행가면 제일 재미있는 것이 시장구경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 보니 한가지 궁금했던 사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튀르키예 마트를 돌아다니며 느낀 것이 있다. 물가가 그리 싸지 않다는 것이다. 1인당 GDP 도 1만$ 정도이고, 고환율 정책으로 물가 상승율도 매우 높다. 오늘이 제일 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파르게 물가가 뛰고 있다. 게다가 마트에서 확인한 농산물 가격도 그리 싸지 않으니 서민들의 고통도 이만저만 아닐터였다. 그런데 여기 알뜰 장이 튀르키예 서민들이 탈출구 역할을 하고 있다. 대부분 가격은 1kg 기준으로 팔고 있으며 무척 저렴하다. 농산물 가격을 알아보자. 딸기 500g 에 25리라 그러니까 우리돈 1200원, 복숭아 1kg에 600원, 가지 1kg 400원, 토마토는 1kg에 300원이다. 대파 1kg 400원, 호두는 다른 것에 비해 엄청 비싸서 1kg 에 1600원.
수박은 1kg에 500원이니 10kg 짜리면 5000원이다. 귀국해서 보니, 이번 여름 한국에서 수박 한통에 3만원이 넘어서 딱 한통 먹고 못먹었다는 마눌의 하소연이 들린다^^ 여기저기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물건을 담는 튀르키예인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잔뜩 물건을 구입하고 일주일을 버티는 것으로 보인다. 알뜰시장이 급격히 상승하는 고환율, 고물가 속에서도 튀르키예 서민들이 살아 갈 수 있는 탈출구를 제공하고 있다. 무엇을 살까 고민하다가 과일 몇 가지와 양송이 버섯을 산다. 며칠간 양송이 버섯을 듬뿍 넣은 양송이 밥을 해서 맛있게 먹었다.
산책하다보니 긴 줄이 늘어선 음식점이 보인다. 그런데 간판에 익숙한 글자가 보인다. 소풍이라는 간판을 단 한식당이다.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니 한국인을 안 보이고 현지인이 대부분이다. 찾아보니 한국 교민이 운영하는 음식점이다. 한류의 바람을 타고 이런 튀르키예 중소 도시까지 한식당이 영역을 넓히고 있다. 요즘 여행 다니며 새삼 문화의 힘을 느낀다. 동양인만 보면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 고 묻던 사람들이 요즘은 예외 없이 한국인이냐고 물어 본다. 그것도 한국말로 물어보는 젊은이를 어렵지 않게 만난다. 한국에 가본 적도 없는데 드라마, 영화를 통해 한국말을 배웠다고 한다. 한국은 이제 세계 젊은 이들이 가장 궁금해 하고 가보고 싶은 핫한 나라가 되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젊은이들의 관심과 애정이 묻어난다. 비록 한국에서는 대통령 부인이 사적으로 받은 2200 달러 짜리 명품백으로 시끄럽지만 말이다......
이스탄불 가는 길 부루사에 들린다. 그냥 지나갈까 했으나 올림포스 산이라 불리우는 울루산이 있는 도시다. 올림포스산이라는 이름을 호기심을 자극한다. 부루사에 대해 알아보자
부루사는 아나톨리아 북서부 마르마라 지역에 있는 도시이다. 튀르키예 내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가장 산업화가 이뤄진 대도시 중 한 곳이며,브루사의 주도이기도 하다. 부르사는 1335년에서 1363년 사이 오스만제국의 첫 주요 도시이자 두번째 수도였다. 고대에는 소아시아의 올림포스산이라고 불렸던 울루산이 우뚝 서 있으며,지금은 스키리조트로 유명하다. 부르사는 정돈된 도시로 성장하였며 비옥한 평원에 접하고 있다. 초기 오스만 술탄들의 영묘들이 있고, 울루자미를 비롯한 오스만 제국 시대에 지어진 대규모 건축물들이 있다. 튀르키예의 그림자극의 등장인물인 카라과즈와 하지바트는 부르사에서 살고 죽은 역사적 인물들을 배경으로 한다. 부르사는 또한 이스켄데르 케밥, 밤을 절여 만든 마롱글라세, 복숭아,로쿰 등의 요리가 유명하다.
1326년에 오스만은 부르사를 차지했고, 그 이후에 부르사는 초기 오스만 제국의 첫 주요 중심도시가 되었다. 이에 따라, 부르사는 14세기 내내 상당한 규모의 도시 성장을 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동트라키아의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정복하고, 1363년에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지만, 부르사는 오스만 제국의 정신적 상업적 중요성을 유지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수도가 옮겨진 이후에도 이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다. 튀르키예 사람들에게는 중국 청나라의 심양과 비슷한 느낌을 느낌을 주는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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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포스산이라 불리는 울루산을 가고 싶었으나 안개가 많이 끼여 있다. 해발 2500m가 넘는 산이니 여름에는 거의 가스가 끼여 있다. 스키리조트로 유명하니 리프트로도 접근이 쉬울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구시가시로 향한다. 어느 도시나 그렇듯이 커다란 모스크, 울루자미가 관광객을 맞이한다.
부르사에서 가장 큰 모스크인 울루자미는 초기 오스만 건축의 랜드마크로서 셀주크 건축의 많은 요소를 통합하였다. 바에지트1세 술탄의 지시에 따라 건립된 이 사원은 1396년부터 1400년까지 건축가 알리 네카르가 설계하고 건설했다. 직사각형 모양을 띤 큰 건물에는 총 20개의 돔이 5개마다 4줄씩 배치되어 있으며, 12개의 기둥이 지탱하고 있다. 울루자미 인근에는 바자르도 발달하여 관광객을 비롯한 많은 인파가 북적인다.
카페에 앉아 차이 한잔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 본다. 그런데 조금 낮선 풍경이 시선을 끈다. 튀르키예 아이를 볼보고 있는 동양인이 보인다. 물어보니 보모로 와서 아이를 돌봐주고 있는 필리핀 사람이란다. 아시아를 비롯해 카타르 같은 중동까지 필리핀 보모들이 와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튀르키예까지 와 있는 필리핀 보모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한국도 줄어드는 출산율과 육아문제로 보모 수입(?) 거론되고 있다. 육아부담을 덜어주자는 취지는 공감할 수 있으나 현실화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국은 전세계 기념비적인 저출산율로 기네스북을 쓰고 있다. 2070년이면 3천만명대로 인구가 줄고 2100년 이면 천만명대로 진입할 수도 있다. 단 기간내에 출산율을 높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은 인구 감소를 막을 수 있을까? 여러가지를 고민해 보아도 현실적인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 보인다. 그것은 이민자를 받아 들이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국민이 이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냐는 것이다. 대구에서 이슬람 성당을 짓겠다고 허가를 받자, 그 앞에서 돼지고기를 구우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민자를 나와 같은 국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니다. 피부색 다른 외국인을 우리의 며느리 사위, 매형 형수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냐는 것이다.
이렇게 튀르키예 여행을 마무리하고 이스탄불로 행한다. 이스탄불에는 꼭 들려야할 곳이 있다. 지난 번에 가지 못했던 예레바탄이다. 예레바탄은 지하 수조이다. 아야소피아 맞은편 방향으로 디반 욜루의 위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1987년에 수백 년 동안 쌓인 진흙과 폐기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벌이면서 복원되었다. 본래 콘스탄티노플 수도 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에 공사를 시작하여 유스타이누스 1세 때인 532년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이곳은 대성당처럼 336개의 둥근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천장이 빛을 발산하는 지하실 형태로 되어 있다. 지하궁전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물공급을 위한 수조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봐 온 대규모의 건축물들은 종교적인 것이거나, 왕실을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여행 중인 튀르키예도 그렇고, 서양 중세의 건축물들도 대부분 그렇다. 일반 시민들의 삶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건축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로마는 수 많은 시민들을 위한 건축물들을 만들었다. 예레바탄도 마찬가지이다. 시작은 왕실의 물사용을 돕기 위해 것이었지만 그 규모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쓰기에도 충분한 규모로 건설되었다. 그것도 그 이전 신전기둥이나 종교적 건축물들을 헐어 이 지하수조의 건설에 사용하였다. 로마인들의 실용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어느 신전의 기둥을 가져와 세웠으나 기둥의 길이가 조금 짧았다. 찾아보니 메두사의 머리가 딱맞는 받침대였다. 아마도 이것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의 머리가 뒤집혀 예레바탄의 기둥이 떠 받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갈라타 다리 아래 식당에서 튀르키예의 마지막 밤을 보내본다.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식당이라 명성만큼 바가지에 가까운 가격을 자랑하지만 이스탄불의 마지막 밤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장소는 없으리라. 한반도의 4배가 넘는 광대한 국토, 8천만의 인구를 자랑하며 유럽에서도 가장 큰 성장 잠재력을 가진 나라. 튀르키예가 용솟음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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