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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튀르키예(2부),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쪽으로 2 - 오르두, 트라브존

볼루를 떠나 흑해 연안으로 향한다. 흑해를 따라서 조지아로 들어갈 생각이다. 국도가 고속도로 처럼 잘 닦여있고 차도 그리 많지 않다. 

국도변 간이 휴게소

투르키예가 자리잡고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는 동서양이 만나는 지점으로 수 많은 역사 속에서 충돌이 벌어진 곳이다. 아나톨리아 반도에 대해서 알아보자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입지조건 때문에 문명 초기부터 양쪽 대륙에서 이주해가거나 정복 전쟁을 하러 가는 수많은 민족들이 지나는 교차로였다. 아나톨리아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동양과 서양 사이에 벌어졌던 수많은 전쟁의 현장으로 알려져왔다. 여기를 통해서 동서양의 충돌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아니톨리아라는 이름이 동양의 뜻하는 오리엔트의 어원이 된다. 

중앙 아시아의 연장인 중부 고원지대는 가항 하천이 전연 없고 자연적인 출입로도 거의 없는 자연지역으로 경관이 단조롭고 기후가 혹독하다. 기름진 계곡이 있고 기후가 좋은 서부 해안지역은 실제로는 유럽의 일부로 분류되기도 한다

(다음 백과 편집)

 

실제로 해발 1000m 정도에 이르고 황무지가 많으며 경작지도 그리 많지 않은 곳이나, 보이는 것은 목가적인 농촌 풍경처럼 보인다. 이런 풍경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샤프란 20g 한국돈 10만원 정도. 샤프란 볼루라서 가능한 가격

흑해로 접어들기 전 샤프란 볼루에 들린다. 샤프란 볼루는 튀르키예 서북쪽의 도시로 향신료 샤프란의 주요 생산지이다. 샤프란은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행신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샤프란 꽃에 붙은 단 3개의 암술대를 수작업으로 채취해하는 번거로움 때문이다. 샤프란 1g을 얻으려면 1천송이 꽃에서 암술대를 채취해 말려야 한다.

비싸기는 하지만 어디나 그렇듯이 좀 많은 양을 구매하면 싸게 살 수 있다. 세명이 두 시간의 협상해 한푼도 못깍아 준다는 샤프란을 50%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한다. 주인이 혀를 내두른다^^ 뭐 우리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정가를 주고 산 물건이 없는데, 그걸 못 깍을까 하며 키득거린다ㅋㅋ   

오르두 바닷가

흑해에 당도한다. 흑해는 바다가 검다고 흑해로 명명되었다고 알려졌으나 자료를 찾아보니 좀 다른 해설도 있는 것 같다. 이미 튀르키예 1부 -이스탄불 편에서 한번 다룬 바 있다. 흑해에 대해 다시 한번 찾아보자

 

동서 길이 1,150km. 남북 최대 길이 610km. 면적은 41만 3,000km.로 한반도의 2배에 이르른다.  최대수심 2,212m. 유럽 지중해의 에게해와는 보스포루스 해협·마르마라해·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이어져 있다. 흑해는 검은 빛깔을 띠며 아름다운 것에 비해 바다 환경이 좋지는 않다. 빙하가 물러가면서 만들어놓은 황화수소가 지표층에 깔려있고, 용해된 산소가 없고 황화수소로 포화된 상태이다. 때문에 수심 150m 아래서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

그런데 흑해라는 이름은 바다의 색깔, 빛의 투과 정도나, 박테리아의 종류로 인해 붙여진 것이 아니고, 다른 이유로 붙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15세기 오스만이 진주하고 나서야 흑해라 불렸기 때문이다. 흑해를 터키어로 하면 karadeniz(검은 바다)가 되는데, 여기서 검다는 뜻의 'kara'는 단순히 검은 것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튀르크족의 관점에서 검은색, 즉 '북쪽'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러한 터키어 단어가 번역되어 다른 유럽국가들에 알려지는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아는 '흑해'의 의미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보여지는 흑해의 바닷빛깔도 그리 검게 보이지는 않는다. 

오르두 전경

오르두에 도착한다. 오르두는 터키 북쪽에 위치한 휴양도시이다. 흑해연안은 비교적 날씨가 온화라고 바다가 거칠지가 않아 많은 도시들이 발달했다. 오르두는 오드두 주의 주도이며 인구는 900,000만명 정도 살고 있다.  오르두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기원전 8세기에 코콜라라는 이름으로 밀레티아인에 의해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지 중 하나로 설립되었다. 유시니아 해의 페리플러스(서기 131년)에 있는 아리아인들은 이곳을 "큰 마을이 아닌" 마을로 묘사하고 시트라라고도 불렸다. 이 지역은 이후 덴마크인의 지배를 받았고, 1214년에는 셀주크, 그리고 1346년에는 하즈밀룰라의 베일리크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1461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69년에 붙여진 지명인 오르두는 튀르크-몽골계 언어로 군대 혹은 군영을 뜻하는데, 조지아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군이 주둔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 인들이 건설한 도시로써 20세기 초만 해도 주민 중 절반 이상이 기독교도였으나 1923년 투르키예 독립전쟁 당시 투르키예 그리스 인구교환으로 모두 이주되어 현재는 튀르크계 무슬림이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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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ume 4 : 탄약과 무기를 성공적으로 전달해 독립전쟁 승리에 기여한다.

오르두에는 1923년 독립전쟁당시 독립운동에 Resume 4 라는 배를 박물관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1차대전에 패배한 오스만제국은 열강에 의해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무너져 가는 오스만 제국은 열강의 강압에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반발한 무스타파 케말을 비롯한 튀르키예 민족주의자들은 서구 열강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인다. 그리스, 아르메니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고 무너져가는 오스만 군대를 수습하며 독립 공화국 튀르키예를 세울 수 있었다. 전시하고 있는 배 Resume 4 는 이 과정에서 무기와 탄약을 성공적으로 운반하여 독립전쟁 승리에 일조하게 된다. 서구 열강은 1923년 로잔 조약을 통해 이스탄불과 에게해 섬 중 하나를 선택할 것으로 강요한다. 결국 이스탄불을 넘길 수 없었던 무스타파 케말은 이스탄불을 선택하게 되고 에게해 섬의 모든 소유권은 그리스로 넘어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흑해 연안 도시인 오르두, 트라브 존 등에 살던 그리스계 기독교인 들과 에게해 섬에 살던 투르키예 인들이 자기 나라로 이동하는 인구교환이 벌어진다. 

보즈테페 전방대

 오르두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보즈테페 전방대이다. 해발 500m 의 산으로 바닷가에 솟아있어서 더욱 더 장쾌한 전망을 제공해준다. 바닷가에서 바로 케이블카로 올라올 수 있으며 현지인들도 많이 찾는 관광지이다. 흑해 연안을 여행하기 좋은 때는 여름이다. 낮에는 기온이 30도 이상 올라가지만 저녁이면 20 안팍으로 선선해 진다.

언덕 위에 패러글리이딩 활공장

한 바퀴 돌다보니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보인다. 이런 곳에 왔으면 반드시 해봐야 하는 것이 익스트림 스포츠, 하늘에 떠서 흑해 바다를 바라보는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가격을 물어보니 120유로, 20만원이 조금 안 되지만 언제 와서 또 타볼 것인가? 세명에 300유로, 협상도 마치고 친구들에게 얘기한다. 그런데 안 한단다ㅠㅠ 무섭다고..... 이런 겁쟁이 녀석들.... 스위스 태국의 스카이 다이빙, 라오스의 초경량 비행기가 얼마나 기억에 남았는데... 혼자 하자니 시간도 여의치 않아 그냥 케이블카 타고 내려온다. 애고..... 

숙소 공유앱을 통해 구한 숙소

이번 여행 대부분은 숙소 공유앱을 통해서 구했다. 장점은 호텔정도의 가격에 아파트 정도의 넓은 숙소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호텔가격에 방도 여러개 있는 아파트 숙소를 구할 수 있고, 주방기구를 비롯한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도 다 이용가능하다. 물론 교통이 그리 편하지 않은 곳이 많다. 랜터카를 이용할 경우 편하게 이용할 수 있으나 대중교통의 경우 불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디나 그렇지만 사기를 당할 수 도 있다^^ 

트라븐 존 쉬멜라 수도원

트라브존으로 이동 쉬멜라 수도원으로 행한다. 쉬멜라 수도원은 4세기에 두명의 그리스 사제가 창건한 수도원이다. 비가 많이 내려 가는 길이 미끄럽다. 사람도 매우 많아 트라브존의 유명 관광지임을 실감한다. 

쉬멜라 수도원 전경 (hepea7블로그에서 인용)

쉬멜라 수도원의 역사를 알아보자.

 

해발 1,200m의 가파른 절벽에 자리 잡은 수도원으로, 바위를 쪼아서 만들었다. 386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때, 그리스에서 온 두 명의 사제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 한다. 그 두명의 사제는 세속적으로 타락해가는 기독교를 정화시키기 위해 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 후로 긴 시간 동안 수도원은 여러 황제들에 의해 복원되었는데, 13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으로 증축되었다. 쉬멜라 수도원은 1916년부터 1918년까지 트라브존이 러시아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러시아에 넘겨졌다가 1923년 다시 트라브존에 돌아왔다. 그 후 1924년 터키와 그리스의 인구 교환 협정에 따라 남아 있던 수도사들이 그리스로 돌아가고 수도원은 빈 채 방치되었다. 1972년 박물관으로 복구되면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지금도 터키 정부가 복원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다음백과 편집)

 

쉬멜라 수도원은 트라브존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며 인근의 러시아 인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아무래도 그리스 정교의 유적이며 프레스코 벽화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교가 존재하지 않는 튀르키예 사람들도 예수가 이슬람의 예언자라며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덕분인지 튀르키예사람들도 인산인해를 이룬다.   

트라브존 아야 소피아박불관

다음날 트라브존 시내 관광에 나선다. 트라브존 역사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트라브존은 튀르키예 북동부 흑해 연안에 있는 도시로, 트라브존 주의 주도이다. 비단길에 자리잡은 트라브존은 수 백년 동안 종교ㆍ언어ㆍ문화가 융합되는 도시였으며, 남동쪽의 이란과 북동쪽의 라시아 캅카스의 관문이었다. 베네치아 제노바상인들이 이 도시에 와서 비단 린넨 모직물 팔았다. 오스만 시대에 트라브존은 항구라는 중요성 덕분에 이란, 인도 캅카스와 이어지는 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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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소피아 박불관 앞 바닷가

라브존은 필자에게는 2002년 월드컵 스타 이을용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 도시이다. 이을용은 2002년 월드컵 성공 이후 트라브존스포로로 이적해 3년간 활약하게 된다. 부침은 있었으나 우리나라 유럽진출 1호 축구선수가 된 것이다. 아직도 이을용을 기억하는 트라브존스포로 팬들도 있으니, 축구는 이 도시의 또 하나의 종교이다.  

요즘은 김민재가 있던 이스탄불의 페네르바체나 갈라타사이에 밀려있지만 이스탄불을 연고로 한 팀 이외에 튀르키예 리그 우승경험이 있는 유일한 팀이다. 유럽 축구팀은 라이벌전으로 유명하다. 유럽의 축구 팬들은 특히 딸 결혼시킬 때 사위의 응원팀을 확인하는 걸로 유명하다^^ 결혼했다고 응원팀을 바꿀 일은 없으니 자칫 라이벌 팀을 응원하는 사위를 만나면 평생 으르렁 거릴 수도 있다.  트라브존스포로도 이스탄불의 갈라타사이와 라이벌관계이며 양팀 팬들은 전쟁을 치르듯이 경기를 하고 있다.

트라브존 보즈테페 언덕

보즈테페 언덕으로 향한다. 트라브존 시내와 흑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트라브존 시민들에게 데이트 장소나 소풍 장소로 사랑받고 있는 곳이다. 메이단 공원에서 돌무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데, 차를 몰고 가면 주차장을 찾아 세우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올라가는 길목을 쭉 돌아서 찻집이 성업 중이기 때문에 찻집이 보인다면 아무 곳에서나 내려도 상관없고, 테크 다리를 한바퀴 산책하고 차를 마셔도 상관없다.

위의 작은 주전자로 잔의 20% 쯤 채우고 아래 주전자 뜨거운 물을 붇는다

테이블에 앉으면 무조건 차이를 한 주전자 이상 주문해야 하는데, 한 주전자로 10잔 이상의 차이를 마실 수 있기 때문에, 여럿이 가도 한 주전자만 주문하면 된다. 그리 오래된 역사는 아니지만 튀르키예인들의 차이 사랑은 유별나다. 어림 잡아도 하루에 20잔 가까이는 마시는 것 같다. 여행자들도 튀르키예 여행을 하다보면 어느새 수시로 차이를 마시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보즈테페 언덕은 특히 흑해의 멋진 석양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해 질 무렵에 맞춰 올라가는 차이 한잔 마시면 여행의 행복감을 온몸으로 느낄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