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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튀르키예, 서양문명의 시원을 찾아서 6 - 카파도키아

2019-10-17

콘야를 거쳐 카파도키아로 가는 길 도로변에 하느(Han)가 보인다. 하느는 실크로드 대상들의 숙소이다. 이곳은 가깝게는 페르시아, 멀리는 중국의 장안, 더 멀리 한국의 경주를 떠난 대상들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플, 시리아, 지중해로 빠지는 중요한 길목이다. 대상들은 하루에 30 - 40km를 이동한다. 따라서 실크로드에는 이 거리만큼 대상들이 쉴 수 있는 숙소가 있다.

오르센하느(Oresin Han). 실크로드 대상들의 숙소

콘야를 벗어나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오르센하느(Oresin Han)가 있다. 12세기 셀주크 튀르크 술탄 2세 때 건설한 것이다. 하느는 실크로드 대상들의 숙소이자 요새이다. 13m 높이의 튼튼한 벽이 성처럼 감싸고 있고 중심에는 모스크가, 그 옆으로는 회랑이 있다. 대상들이 쉬면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식당, 숙소, 목욕탕 등의 다양한 시설들을 구비하고 있다.  비단길은 중국 장안에서 출발하여 천산산맥, 파미르고원, 사마르칸트에 이르는 중앙아시아를 지나 카불, 이란, 이라크를 거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는 장장 10,000km의 여정이다. 얼마나 많은 강도 혹은 무법자들이 있을지 상상조차 안 된다. 그런 상황에서 하느는 물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튀르크 제국은 대상들이 강도를 당하면 그만큼의 피해를 돈으로 보상해 주는 일종의 보험제도를 만들었다. 또 술탄이 보증하는 수표를 발행해 대상들이 거액의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도록 했다. 이런 정책은 비단길의 통한 무역이 더욱더 번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튀르크 제국이 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어던 이유가 단순히 군사력만은 아닌 모양이다. 지금은 식당 겸 기념품 점으로 이용되고 있다. 잠시 들려서 실크로드 대상들의 숨결을 느껴본다.    

카파도키아는 네브쉐브르 주에 속하며 터키 국토 중앙에 위치한다. 터키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며 다양한 익스트림스포츠도 체험할 수 있다. 카파도키아 안내판이 보이고 언덕을 하나 넘는 순간 전혀 본 적이 없는 풍광이 펼쳐진다. 카파도키아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카파도키아는 아나톨리아 반도 한가운데에 있으며 3백만년전 에르지예스산(3,914m)이 대규모 폭발을 일으켰던 화산 지역이다. 마그마 분출로 만들어진 용암바위 주위로 폭발 후폭풍인 화산분진이 내려앉아 응회암으로 굳어진다. 무려 20,000 ㎢(남한 면적의 5분의 1)에 달하는 면적이 뒤 덮인다. 응회암은 화성암에 비해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비바람에 쉽게 깎여나간다. 그리고 자갈이 많고 침식을 잘 견디는 바위가 응회암 위로 덮여 카파도키아 지역 특유의 버섯바위를 만들어 냈다. 카파도키아는 4 ~ 13세기에 걸쳐 건립된 기암마을들을 일컫는 지역명으로 어원은 고대 페르시아어로 아름다운 말들의 땅이라는 뜻인 카타파투카(katapatuuka)에서 온 것이다. 이곳에 땅 위에 우뚝 솟은 기암들은 다른 말로 ‘요정의 굴뚝’이라고 불린다. 이 바위들을 보면 요정들은 어디 있을까 궁금증이 생길 만큼 독특하게 생겼다. 1985년 유네스코는 100㎢ 가 넘는 면적을 유네스코 복합유산으로 등재한다.  

이 지역은 BC23세기 부터  BC12세기 까지 존재한 고대 왕국 히타이트의 주무대다.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사가 인근에 있으며 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철기문화로 대표되는 히타이트는 인류문명사에 대단히 중요한 왕국이다. 그런데 고대의 강력한 왕국 히타이트는 19세기까지 잊힌 왕국이었다. 심지어 헤르도투스조차 BC 5세기 이곳을 여행하다가 발견한 히타이트 부조물을 이집트 것이라고 생각했다. 멸망한 지 700년밖에 안 된(?) 헤르도투스의 시대에도 히타이트는 이미 잊혀진 왕국이었다. 이집트와 메스포타미아에 버금가며 인류 최초로 철기를 사용했고 자신들의 종교와 언어를 가지고 있었던 히타이트 문명은 어떻게 3000년 간이나 철저히 잊힐 수 있었을까? 아마도 서양인들은 이집트, 매스포타미아 문명 이후 동양에서 발전된 문명은 없었다고 본 것은 아닌가 싶다. 그리스와 자웅을 겨루었던 페르시아가 동양에서는 가장 오래된 문명이며 아나톨리아 지역에는 그리스 로마 이전에 어떠한 주목할만한 문명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심지어 하투샤도 19세기 히타이트의 수도로 확인되기까지 로마시대 있던 켈트족의 수수께끼 문명으로 치부되었다.  

카파도키아 버섯바위

화산 분화에 의한 화산재와 용암 등이 오랜 세월을 거쳐 바람, 비, 눈, 강물, 호숫물 등에 의해 침식하고, 지진도 겪으면서 기암들이 형성되었다. 침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기암들과 함께 사람들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간 도시와 집들은 더욱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미로처럼 얽힌 그곳은 로마 시대 후기에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교 사람들이 숨어 살았던 곳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지하 교회만도 수천 개가 있는데, 지하도시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만화영화 스머프의 영감이 되었고, 스타워즈의 한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알려져있다. 그런데 확인해 보니 사실이 아니란다^^  조지 루카스는 카파도키아에서 스타워즈 촬영을 하려고 했지만, 터키 정부에서 허락을 해주지 않았다. 스타워즈는 미국의 데스밸리, 모로코의 아잇벤하투 등에서 촬영되었다.

스타워즈는 내가 어렸을 때 영화관에서 본 몇 안 되는 영화 중의 하나이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극장에 갔다. 피카디리극장으로 기억되는데 아버랑 영화를 본 것은 이것이 두번째이자 마지막이었다. 스타워즈 1편(정확히는 에피소드 4)은 전혀 다른 신세계였고 평생 나를 스타워즈 덕후로 이끌었다. 컴퓨터그래픽도 없던 시절 어떻게 촬영이 가능할지 상상도 안 가는 전투 장면은 나를 우주 파일럿으로 이끌었다. 우주 행성 카페에서 벌어지는 여러 행성인들의 에피소드는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 가슴을 설레게 했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이 장면은 이후 '용문객잔' 비롯한 수많은 영화에서 오마주 되었다. 이 영화는 이후 50번쯤은 본 것 같다. 총 6편이 제작되었지만 누가 뭐래도 최고의 작품은 에피소드 4이다. 몇 년 전 조지루카스에게 판권을 사들인 디즈니가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새로운 시리즈 3편을 기획했고 두 편이 나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재앙 수준이다. 내년에 마지막 편이 나온다고 하는데, 벌써부터 극장에 앉아 실망하고 있을 모습부터  떠오른다ㅠㅠ  그나저나 얼른 아버지 모시고 영화관을 한번 다녀와야 할 듯하다^^

우치히사르. 요새이자 망루로 사용되었다

요정의 굴뚝 중 가장 규머가 큰 우치히사르는 '히사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그 자체가 하나의 마을이며 성채이다. 비잔티움 제국 때는 무슬림의 침입에 대항하는 중요한 요새였다. 우치히사르 언덕에는 돌과 흙벽돌을 섞어 지은 가옥들이 보이는데, 동굴에 살던 사람들이 옮겨와 사는 곳이다. 우치히사르는 멀리서 보면 더욱더 신기해 보인다. 오다가다 우치히사르를 보자니 일본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떠오른다. 일본 영화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여기 카파도키아 우치히사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애니메이션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는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우리 세대의 고전인 '미래소년 코난'부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터', '이웃집 토토로' '쎈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을 제작해 말 그대로 애니메이션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 애니매이션이 미국과 더불어 양대 산맥을 구축하게 된 데에는 다른 한 사람의 선구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는 일본 만화의 신이라고 불리우는 데스카 오사무이다.

데스카오사무는 1928년 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만화 그리기를 좋아했다. 일찍부터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내다본그는 1961년 데스카 오사무 프로덕션을 설립해 애니매이션 제작에 뛰어든다. 특히 상업방송인 후지TV 개국에 맞춰 '철완 아톰' 제작해 방송하기 시작한다. 철완 아톰은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일본의 방송국과 만화업계가 애니매이션 제작에 뛰어드는 기폭제를 마련한다. 이후 '정글대제' '리본의 기사' 등을 제작하여 상업적 성공을 이어 나간다. 특히 데스카 오사무는 제작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리미티디 시스템과 '뱅크 시스템'이라 불리는  방식을 고안한다. 리미티드 시스템은 미국처럼 어마어마한 규모의 제작비와 인력투입이 불가능한 일본의 현실에서 1초에 24장이 들어가야 하는 삽화의 수를 과감하게 줄인 것이다. 그리고 캐릭터의 표정과 배경이 유사한 것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제작비용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었고 쉽게 애니매이션 제작에 뛰어들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1초에 24장 프레임이 필요한 것은 영화나 애니매이션이나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요즘 디즈니는 부드러운 동작연결을 위해 초당 30프레임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데스카 오사무는 이것을 12 - 17 장 심지어는 7장까지 줄여버린 것이다. 당연히 동작이 부드럽지 못하고 거칠고 딱딱한 화면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동작이 거칠어 지다보니 좀더 역동적인 화면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부드러운 디즈니 애미매이션과 다른 역동적이고 거칠은 일본의 애니매이션에 열광하기 시작한다. 이후 부드럽지는 않으나 거칠고 역동적인 화면은 일본 애니매이션의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동굴호텔. 응회암을 파내 호텔을 만들었다

카파도키아에는 동굴호텔이 많다. 예전에 사용하던 주거지를 호텔로 개조하기도 하지만 새롭게 만든 것도 많다. 응회암은 재질이 약해 호미 수준의 연장으로도 쉽게 파진다. 심지어 손으로 굵어도 돌가루가 떨어진다. 이런 약한 암석이니 동굴을 파고 들어가 무엇을 만들기에 좋았을 것이다. 카파도키아 동굴 호텔들에는 에어컨이 없다. 해발 1500m 정도의 고원이라 낮에는 조금 덥지만 밤에는 20도 이하로 떨어진다. 두꺼운 벽도 자연 단열재 역할을 해서 그리 덥거나 춥지 않다. 문제는 돌가루가 좀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위에도 여기저기 보이는 데 자다가 입속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동굴 호텔 옥상 카페

카파도키아 숙소 대부분이 몰려 있는 괴레메 마을의 호텔들은 대부분 옥상에 카페테리아를 만들었다. 그렇게 높지 않은 숙소에서도 바라보는 마을 경치는 카파도키아 특유의 버섯바위와 어울려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루프탑 풍광의 집합체일 것 같다. 괴레메 마을은 카파도키아 여행의 시작점이다.  

러브밸리

카파도키아에는 풍광이 독특한 계곡이 많다. 화이트밸리, 레드밸리, 로즈밸리, 러브밸리, 몽밸리 등. 이들 밸리 대부분에서 트레킹과 익스트림 스포츠, 열기구 비행 같은 것을 진행한다. 그중 몇 곳을 소개해보자. 먼저 '러브 밸리'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러브 밸리하니 무슨 연인들의 사연이 있는 곳 같은데 사실은 버섯바위 모양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즉 버섯바위가 남성의 상징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느 나라든 남성의 상징이나 여성의 상징은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된다. 특히 남성은 상징은 아들을 바라는 부모들의 중요한 기도처가 된다. 러브밸리가 한국에 있었다면 기도빨 좋다는 팔공산 갓바위를 제치고 한국 최고의 아들 낳는 기도처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몽밸리

러브밸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몽밸리가 있다. 이곳은 수도사들이 많이 살았다 해서 'monk vellry' 불린다. 송이버섯과 매우 비슷한 버섯바위가 펼쳐져 있는 골짜기이다. 현지 사람들은 버섯바위에 요정들이 살고 있다고 믿어 '요정이 춤추는 바위'라고 부른다. 버섯 모양의 독특한 바위는 이곳 특유의 지층 특징 때문에 생긴다. 세상을 등지고 속세를 떠나 신앙생활에 몰두할 것을 주장한 고대 수도사는 왜 이곳으로 들어왔을까?  로마시기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이 계곡으로 피신했다. 로마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지하의 동굴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하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수도사들이 모여 집단을 이룬다. 지형적으로 외적이 침입하기 어렵고 토지도 비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역을 다시 튀르크가 장악하자 카파도키아는 또 다시 피난처가 된다. 이들은 동굴에 숨어서 교회를 만들고 예배를 드리며 성화를 그렸다.

괴로뫼 야외박물관

괴레메 마을 위쪽으로 야외 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수많은 동굴교회가 존재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 교회에는 예수와 관련된 성화들로 가득 차 있다. 빛을 덜 받아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도 있지만 무슬림과 비롯한 타 종교인들에 의해 훼손된 것들도 많다. 남아 있는 벽화는 나름 수준이 있는 것도 있고 아마추어 솜씨로 보이는 것도 있다. 이곳에 살던 수도사들이 직접 그린 것이니 성베드로 성당의 미켈란젤로 성화와 비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미소 짓는 성모마리아를 그린 성화가 있다. 보통 성모마리아는 근엄하거나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에서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왜 이렇게 교회가 많은 것일까? 기독교 세계관이 세상을 지배하던 중세의 유럽의 도시에도 교회가 이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곳의 지형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유럽의 도시에서 교회는 개인이나 몇몇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독실한 신앙이 있어 교회를 예수님께 바치고 싶어도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재정은 더더욱 아니었다. 도시의 통치자 역시 혼자서 교회를 만들어 신께 바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피렌체의 메디치가가 가족성당을 만들었지만 이 역시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카파도키아에서는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교회를 만들 수 있다. 버섯바위 안쪽에 동굴을 파서 만드는 것이니 규모의 한계는 분명하다. 버섯바위와 지하에는 땅주인도 따로 없다. 약해서 부서지는 바위를 말 그대로 열심히 파내면 된다.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교회를 만들 수 있었다. 또 수도사들은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드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남는 시간을 보낼 소일거리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평생을 이곳에서 숨어서도 지낼 수 있는 독실한 신앙과 열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열정으로 그들은 교회를 만들고 벽화를 그렸다.              

카파되키아의 명물 열기구

요즘 카파도키아를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만든 또 하나의 이벤트가 있다. 열기구 투어인데, 새벽 카파도키아 버섯바위 지형 위로 날아올라 일출을 보며 떠다니는 체험은 어디서도 경험해 볼 수 없다. 수많은 관광지에서 열기구 투어를 만들었지만  카파도키아의 풍광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몇 년 사이 유명세를 타고 가격도 계속 오르고 있다. 2010년대 초반 100유로 안팎 하던 가격이 지금은 거의 200유로 까지 올라갔다. 물론 비수기에는 이보다는 싸다. 그런데 단순히 소문 때문에 가격이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카파도키아에 중국인들이 넘쳐나자 이곳 열기구 운영업체 대부분을 중국인들이 인수한 것이다. 중국 광광객만으로도 아쉬울 것이 없으니 가격이 오르기 시작한다. 열기구 가격은 소형차 한 대 수준, 빠르면 한 달 늦어도 몇 달이면 열기구 가격을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 비싼 열기구 투어를 하지 말아야 하나... 그럴 수는 없다. 여행 가서 입장료와 체험비를 아끼는 것만큼 바보짓은 없다.  2000년 초반 스위스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한 적이 있다. 200유로라는 비용 때문에 한참을 망설였다. 그렇게 주저하다가 경험한 스카이 다이빙이지만 당시 여행 최고의 경험이었고 지금도 알프스 만년설 위로 점프하던 그때가 생각이 난다.           

데린쿠유 지하도시. 규모나 엄청나게 크며 심지어 지하에 감옥도 있다.

지하도시 '데린쿠유'로 향한다. 데린큐유는 동굴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지하에 만들어 놓은 도시이다. 이 지역에는 무려 150여 개의 지하도시가 있다. 소규모를 거주지를 제외하고 도시라고 불릴 수 있는 것만도 36개가 존재한다. 이 도시들은 지하통로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무너질 위험과 길을 잃어버릴 위험 때문에 네브세히르 남쪽에 있는 '카이마클리'와 '데린쿠유' 두 개만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카이마클리는 지하 55m, 8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2만 명 정도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하도시는 히타이트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로마, 비잔틴 제국을 거치며 규모가 커졌다. 특히 비잔틴 시대에는 튀르크와 사산왕조의 탄압을 피해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지하로 내려왔다.  

테린쿠유 환기구

데린쿠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이다. 지름 1m 남짓의 수직 구멍을 파서 물과 공기를 공급했다. 이 통로를 통해 위층과 통신을 주고받아 외적의 침입 시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현재까지는 지하 8층 120m까지 발굴되었다. 전체적인 도시의 규모는 지하 20층까지 있으며 전체적으로 무려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한 층 씩 내려가면 방과 부엌, 교회, 창고, 포도주 저장고 등이 있으며 심지어 무덤과 지하도시에서 죄지은 사람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징벌공간도 있었다. 

스톤도어. 위급상황에는 굴려서 닫는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통로에는 외부에서 열 수 없는 돌문(스톤도어)을 설치하였다. 이 돌은 약한 응회암이 아닌 화강암으로 보이며 외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돌문으로 시간을 벌고 지하통로를 통해 다른 지하도시로 도망을 갈 수 있었다. 데린큐유 지하 3층에 위치한 통로는 무려 9km 이어지며 다른 지하도시 카이마클리로 연결된다. 놀라운 점은 지하에서 어떻게 방향을 가름해서 9km 연결할 수 있냐는 것이다. 전체적인 지하도시의 실태와 규모는 아직도 다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지하도시는 중국 투르판의 수로(水路) 카레즈를 연상케 한다. 중국 투르판에는 천산산맥의 눈 녹은 물을 지하수로로 마을까지 운반하는 카레즈를 파놓았다. 1년 평균 강수량 16mm 건조한 땅에서 지상의 물길은 증발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하 수로를 만들어 물을 공급했다. 1000 여 갈래의 카레즈를 지하에 만들었고 그 전체 길이는 무려 5000km이다. 이 수로를 통해 이곳은 돌궐어로 풍요로운 곳을 뜻하는 '투르판'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카레즈는 만리장성, 3200km의 베이징 항저우 운하와 더불어서 중국의 3대 토목공사로 불린다.

이 지하도시들은 카파도키아의 동굴집과 더불어 최근까지도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1차 대전 패배 이후 열강의 간섭에 시달리던 터키는 이스탄불을 지키기 위해 에게해 섬 전부를 그리스에게 양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나톨리아 반도에 살던 기독교도들에게도 선택의 자유를 주게 된다. 그리고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이곳에서 수천 년을 살던 그리스계 기독교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지하도시는 버려지고 파괴되어 잊혀갔다. 1965년 이 지하도시는 우연히 발견되었고 발굴 복원의 과정을 거쳐 일반에 공개되었다.

데린쿠유를 마지막으로 이스탄불로 돌아간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0일간의 터키여행을 마치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리고 여행기를 정리한다고 또 두 달을 보내니 여행을 다시 갔다 온 느낌마저 든다^^  늘 그렇지만 여행을 마무리할 때 드는 생각은 '다음은 또 어디를 갈까'라는 생각이다. 뭐 어디든 문제일까. 발길 따라 마음 가는 곳으로 가면 그만인 것을. 그래도 터키는 언젠가 다시 와야 할 곳인가 보다...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길 잠시 들린 '샤프란볼루'라는 도시가 있다. 같이 여행을 다녀온 재필이가 여행기를 정리하고 있다. 정리되는 대로 '목발 짚고 떠나는 세계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올려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