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30
트로이를 떠나 페르가몬으로을 향한다. 페르가몬으로 가는 길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아소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대학이 있던 도시이다. 예정에는 없었는데 급히 방향을 수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근거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사실 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곳 소아시아 출신이다. 탈레스 물론이고 아낙사고라스 등이 소아시아 출신이다. 그리스 영토는 본토와 에게해 연안, 그리고 소아시아에 걸쳐 있다. 그리고 소아시아 지방은 그리스 도시국가 성립 이전부터 유구한 문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전통이 철학자 뿐 아니라 많은 시인 작가들이 배출되는 토양이 되지 않았나 싶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창시자 피타고라스, 역사의 아버지 헤르도투스, 그리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의 작가 호메로스도 소아시안 연안의 에게해 섬 출신이다.

아소스는 마을 뒤 바닷가쪽으로 200m 가파르게 솟아있는 원뿔모양의 언덕에 아테나 신전을 품고 있다. 가파른 지형인 애드레미트 만의 북쪽에 있는 거의 유일한 항구이다. 아소스는 이러한 지리적 잇점을 안고 일찍부터 문명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BC 6세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테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후 아소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으며, 그후 마케도니아 장군 리시마코스와 페르가몬 및 로마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소스의 전제군주인 아타르네우스에게 초청을 받고 이곳에 플라톤파(派) 대학을 세웠다(BC 348~345). 또 이곳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제자인 헤르미아스의 조카와 결혼을 했던 곳이다. 스토아 철학자인 클레안테스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사상사에서 설명이 필요없는 유명한 인물이다. 그런데 나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철학이나 사상보다도 소설 한편으로 더욱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것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시학 2편' 때문에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14세기 이탈리아의 엄숙하고도 음침한 분위기의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이 미스테리한 건은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이 책 이후로 움베르토 에코의 팬이 되어 그의 책들을 열심히 찾아보았던 것 같다. '장미의 이름'은1980년 후반에 한국어판이 나왔고 숀 코넬리 주연으로 영화도 만들어 졌다.
영화배우 숀 코넬리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나이가 들 수록 멋있어 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을 외모만 보고 판단한다는 한계는 있지만 숀코넬리는 젊은 시절보다는 나이 들어서가 휠씬 더 멋지다. 1930년 생인 숀코넬리는 '007 살인번호' 에 나오는 30대 보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50대가, 그리고 그보다도 '더록' 에 나오는 60대의 모습이 휠씬 더 멋있다. 나도 이렇게 늙어갈 수 있을까? 어디 감히 숀 코넬리에 비교하냐고 여기저기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소스에서 이것저것 찾아 다니다 보니 재미있는 장소가 보인다. 아소스에서 2,30 km 정도 떨어진 바바칼레라라는 곳인 데 일명 '아시아의 땅끝' 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지도를 찾아보니 아시아의 가장 서쪽인 아나톨리아 반도에서도 가장 끝자락이다. 아시아의 끝이라.... 흥미가 동한다. 거리는 가까운 데 비포장이고 길도 안 좋아 1시간 반 가까이 걸린다. 가다보니 설명 하나 없는 주거지나 성벽의 흔적들이 보인다. 전혀 발굴 조차 안 되고 그냥 길거리에 버려져 있다. 이것은 또 어느 시대 누구의 유적인가?

가파른 산길을 내려서니 조그마한 마을이 나타난다. 오스만시대의 해안 방어용 성채도 보이고 몇 십 가구 정도 사는 조용한 마을이다. 대중교통도 거의 안 다을 것 같은 이 조그만 마을에도 한국인들이 가끔 다녀간단다. 차가 있어야 올 수 있는 곳인데, 하여간 전세계 한국인들이 안 가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식사 때가 되어 식당에 가니 다양한 해산물이 보인다.
지중해에 왔으면 문어요리를 먹어야 한다. 문어는 낙지와 달리 거의 모든 나라에서 즐기는 요리이다. 지중해식 문어 요리의 특징은 문어를 산채로 땅바닥에 패대기를 쳐 부드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보면 좀 잔인하기는 한데, 패대기를 칠 수록 거품이 나오며 점점 부드러워진다. 산채로 그냥 찜통에 넣어 삶아 먹는 우리 요리법이 좀 더 인간적으로 보일 정도이다^^ 사실 문어는 바다의 생물 중에 지능이 높기로 유명하다. 문어의 지능에 관한 연구는 이탈리아에서 많이 진행되었는데 놀라운 수준이다. 먼저 문어는 학습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다. 먹이가 들어 있는 잠겨 있는 유리병을 따는 다른 문어를 한번 보기만 해도 그대로 따라서 한다. 또 문어는 대단한 위장 능력의 소유자이다. 자신의 몸 색깔을 주변환경과 같게 변화시키는데 심지어 자연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는 프렉탈 무늬 위에 놓아도 자신의 몸을 프렉탈 무늬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문어는 자신의 몸 크기를 정확히 알고 있다. 문어는 가두어 놓아도 스스로 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을 한다. 즉 나갈 수 있는 구명이 있으면 다리를 집어 넣어 그 크기를 가름한다. 문어는 어디든 머리부위의 연골이 빠져나갈 수 있으면 탈출이 가능하다. 그런데 자신의 다리를 넣어 그 크기를 확인하고 머리 연골보다 탈출 구멍이 작으면 탈출 시도 조차 하지 않는다. 놀라운 문어의 능력이다. 이런 지능의 문어를 산채로 삶아 먹고 있으니 좀 미안하기는 하다^^

페르가몬으로 가는 길, 숙소를 찾아본다. 그런데 취사가 가능한 페션을 찾으려니 쉽지 않다. 결국 페르가몬에 도착하여 찾아보기로 한다. 몇 군데 펜션에 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어서 그 자리에서 예약을 한다. 펜션마당에 차를 세우고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니 주인장이 웃어 죽는다고 낄낄거린다. 뭐 웃겨도 어쩌겠어 인터넷 예약이 좀 더 저렴한 것을^^ 150년이나 된 고풍스러운 '페르가몬 펜션' 을 주인장이 딸과 둘이서 운영하고 있다. 주인장 아이든은 케임 매니아다.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어찌나 웃어 대는지.... 나이도 먹은 친구가 뭐 저리 온라인 게임을 좋아하나 싶다. 한국인이라고 하니 '퀸 마야'를 아느냐고 물어본다. 처음에는 모르겠다고 하니 한국 가수란다. 혹시 마야? 다시 물어보니 얼마전 자신의 펜션에 묵고 갔다면서 사진을 보여준다.우리가 알고 있는 가수 마야가 맞다. 열흘 정고 있다가 갔는데 그 사이 아이든은 마야의 열혈 팬이 되어 버렸다. 노래도 잘하는데 친절하기도 하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친구는 또 한국 드라마의 매니아다. 터키 시골에 와서 늙수구레한 한류의 열혈 팬을 만날 줄이야^^ 음식 솜씨도 좋아서 다음날 준비해 준 조식은 터키에서 먹었던 최고의 아침식사였다.

시내관광에 나선다. 붉은교회를 찾아가는 길,교회 바로 앞 마당에 미처 정리하지도 못한 유적의 잔해들이 보인다. 3000천 역사를 가진 도시니 도처에 유적이고 유물이다. 뭐낙 많은 문명과 양식이 뒤엉켜 정리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페르가몬의 현재 터키 지명은 버르가모, 신화에 나오는 영웅 네옵톨레모스와 안드로마케의 아들인 페르가모스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계속되는 발굴을 통해 도시의 역사가 BC 8세기에 시작되었다는 확인되었으며, BC546년 페르시아가 도시를 정복하기 전 이곳에는 리디아 왕국이 있었다. 페르가몬은 현재까지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이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현지인들은 페르가몬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3가지 단계를 둘러 보는 것이 좋다고 추천한다. 우선 아크로폴리스롤 보고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붉은 교회와 박물관을 간다. 두번째는 고대 의료의 줌심지였던 아스크레피온을 보고 마지막으로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튼튼하게 만들어진 말테패 고분을 보는 것이 좋다고 추천한다.

도시 한가운 데 붉은 교회가 있다. 터키어로 크즐아블루라 하는데, 크즐은 붉은색을, 아블루는 뜰을 뜻한다. 붉은 벽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붉은 대성당’ 또는 ‘레드 바실리카’ 등으로 불린다. 요한 계시록에 의하면 소아시아의 7대 교회 중 한 곳이 이곳에 자리했었다고 한다. 이곳 붉은 교회로 추정되며, 붉은 벽돌로 아치를 쌓아 올리며 지은 이 육중한 건물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3개의 종교가 번갈아 거쳐간다. 처음에는 2세기 로마시대에 이집트 신상을 받드는 사원으로 지하세계의 신인 세라피스에게 바쳐졌다. 세라피스는 그리스의 하데스와 동일한 신이다. 이후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가 국교화하면서 중세까지 성당으로, 오스만 제국령이 된 뒤로는 1950년대까지 무슬림 모스크로 쓰였다. 지붕이 없어진 것 외엔 1800 여년간 건축 뼈대가 온전하게 남아 있다.

페르가몬을 대표하는 유적지는 누가 뭐라해도 아크로폴리스이다. 해발 275m 언덕에 세워진 아크로폴리스는 고대의 그 어느 곳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며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시내 한가운데 우뚝 높이 솟아 있어 어디서나 보이며, 방어에도 유리했을 것이다. 아크로폴리스는 차레로 어퍼)Upper) 미들(Middle) 로우(Lower)아크로폴리스로 나뉘고 종교와 정치, 상업과 사회문화적인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며 나란히 세워졌다. 신전과 지배층의 주거지가 있는 어퍼 아크로폴리스가 가장 규모도 크고 화려하다. 특히 로마시대에 지어진 트라이아누스 신전은 남아있는 기둥만으로도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신전은 로마 트라잔 황제가 사망한 후117-138 년 사이에 하드리안 황제가 트라잔 황제를 기리기 위해 페립테로스 양식으로 지어졌다.

트리아누스 신전의 남쪽으로 조금 가면 고대 세계에서 두번째로 컸던 도서관에 도달한다. 기록에 의하면 로마시대에 이십 만권이 넘는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책들은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수입해 온 파피루스로 만들었으나 샘이 난 이집트가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해 버리자, 페르가몬 시민들은 세계최초로 양피지를 생산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양피지를 뜻하는 영어의 파치먼트(parchment)는 페르가몬의 작품이라는 뜻의 페르가먼트(pergament)에서 비롯된 것이다. 탈레스 전투를 통해 종이가 서방에 전해진 7세기 까지 양피지는 지식을 보관하고 전달하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유럽문명은 페르가몬에 커다란 빛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사관이었다. 그런데 로마의 카이사르와 전투 과정에서 이 도서관에 있던 책들이 모두 불타 버렸다. 그후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페르가몬 도서관의 이십 만권 책들을 모두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보내버렸다. 그러나 아랍의 군대가 647년 이집트를 침공하였을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지게 된다. 아랍 군대를 이끈 암브르 엘아스르는 '코란 이외의 책은 없다' 하면서 이 책을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죽일 놈들' 고대 인류 문화의 정수를 한낱 자신의 사랑의 선물로 활용한 놈도 나쁜지만, 그것을 불태운 천인공노할 짓을 한 놈은 능지처참을 해도 모자랄듯 하다... 너무 과격해지나....

도서관 남쪽으로 더 가면 가파른 야외극장이 나온다. 이 극장은 BC 3세기 유메네스 2세 때 세워졌다가 로마시대에 개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발굴조사를 통해 BC 3세기 휠씬 전에 극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즉 고대부터 내려오는 극장을 계속 보수 확장한 것이다. 아크로폴리스의 이 야외 극장은 역사상 가장 가파른 경사로에 만들었으며 무려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 에페우스의 야외극장과 더블어 소아시아아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규모의 극장이다. 로얄박스와 대리석 연단, 극장 테라스도 확인되며 지금으로 부터 무려 2000년 전에 1만명이 모여서 어떤 공연을 감상했을까 궁금해지는 것은 나만은 아닐듯 하다^^
이 외에도 아크로폴리스에는 수 많은 유적들이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주거지를 비롯해 도시의 수호여신 아테나에 바쳐진 아테나 성소. 극장 아래에 세워진 디오니소스 신전.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제우스 제단. 그리고 여기서 언급조차 하지 못한 미들 아크로폴리스와 로우 아클로폴리스 등 수 많은 유적들이 답사객을 설레이게 만든다.

페르가몬에 가면 다른 곳에는 흔히 볼 수 없는 유적이 하나 있다. 인류최초의 종합병원 혹은 건강센터로 불리는 아스클레피온이다.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2세기 하드리안 황제(117-138)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발굴된 유물에 의하면 아스클레피온이 처음 세워진 것은 BC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000년전에 만든 좋합병원이라...... 아스클레피온은 다양한 건물들이 있는 종합 건강센터로 지어졌다. 그 가운데 하나는 치료실 텔레스포레이온으로 이어지는 80m의 신성한 터널이다. 햇빛과 공기가 잘 통하게 천장전체에 구멍을 뚫어 치료수와 진흙으로 목욕을 하고 나와 치료실로 가는 환자들을 추위에서 보호하고자 만들었다. 여름이면 또 더위를 식혀주기도 하였다. 이곳은 수백 년 동안 진흙에 묻혀있었기 때문에 보존상태가 완벽하다.

그 외에도 아스클레피온에는 황제의 홀과 도서관, 아스클레피온 신전과 예배소, 신성한 우물, 수면실, 진흙 목욕탕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면 원형 기둥이 줄지어 있는 주랑를 지나 치료소인 텔레스포레이온에 다 다른다. 치료소 입구의 기둥에는 ‘죽음은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 의사의 진료를 받은 후 치료 가능성이 있다는 통보를 받아야 했다. 치료 가능성이 없는 환자는 애초부터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환자들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치료동에서는 명상, 운동, 마사지, 진흙목욕 등 자연 치료법과 유사한 치료가 이뤄졌다. 안쪽에는 현재는 소실된 ‘잠의 방’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환자들이 잠을 자며 꾼 꿈을 의사인 신관에게 이야기하면 신관은 그 꿈을 아스클레피온의 계시로 해석해 환자에게 처방을 했다고 한다. 아스클레피온은 단 한 명의 환자도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고 전해지지만, 죽음을 맞게 될 경우 몰래 시신을 밖으로 내보냈다는 얘기도 있다. 아마도 이것이 사실일 것이다.
로마시대에 최전성기를 누렸던 아스클레피온은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4세기부터 버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유럽에서 현대적 의미의 병원이 처음 생기는 17, 8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정도 규모의 병원과 요양센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간에게 질병과 죽음의 공포가 사라진 것이 아닐텐데, 어떻게 병원과 의사가 줄어 들고 의료기술이 급격하게 후퇴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기독교적 세계관과 관련이 있는듯 하다. 사람이 아픈 것도 신의 뜻이고 죽음도 관장하는 것도 신의 영역이었다. 결국 사람이 병에 걸리면 기도를 통해 신의 도움으로 치료하고자 한다. 당연히 사제의 역할이 막중해진다. 심지어 유럽에서는 16,7세기까지 이발사가 외과 의사를 역할을 수행하였다. 가위질을 잘 한다는 이유 때문인데 지금도 이발소의 상징인 싸인볼도 이 때 생긴 것이다. 즉 싸인볼의 빨간색은 동맥, 파란색은 정맥, 흰색은 붕대를 가리킨다.
18세기 이후에 생긴 병원도 치료보다는 수용이 목적이었다. 일종의 격리인데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물론 현대 병원의 목적은 치료이고 과거에 비해 환경도 많이 좋아졌다. 그런데 의사이자 시인인 '노태맹'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단언한다. 100년 뒤에 보면 야만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개인의 존엄성이 보장받지 못하는 병원이 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곳은 '요양병원' 이다. '과거에는 몇몇 역적들 목을 쳐 죽이고 다른 사람은 살게 내버려 두었는데, 지금은 몇 몇만 살게 해주고 나머지는 죽게 내버려 둔다' 는 '푸코'의 말이 지금은 요양병원이 가리킨다며 강하게 비판한다. 이제 고령화와 더불어 요양병원과 요양원은 우리 삶에 깊숙히 들어왔다. 이제 이곳에서의 인간의 존엄성과 죽음의 문제를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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