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30
이스탄불을 떠나 마르마라해를 따라 내려간다. 마르마라해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바다. 양쪽으로 다드라넬스 해협과 보스포러스 해협이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바다지만 지정학 위치 가장 중요한 바다 중에 하나라고 할수 있다.
마르마라해의 서쪽, 이 지역은 갈리폴리 반도 라고 불리운다. 갈리폴리 반도는 1차세계대전 최고의 격전지, 갈리폴리 상륙작전의 무대이다. 갈리폴리, 튀르키예어로 겔리볼루(Gelibolu) 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바라보는 튀르키예 유럽 쪽 영토 안에 있는 항구다. 마르마라해를 거쳐 흑해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되자 영국은 지중해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튀르키예를 동맹국들로 부터 고립시키기 위해서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기획한다. 1915년 2월 19일과 25일, 3월 25일, 총 3번에 걸쳐 걸쳐 영국 ·프랑스의 연합함대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튀르키예 연안 방어시설을 포격하며 갈리폴리 주변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세차레에 걸친 상륙에도 불구하고 터키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갈리폴리 상륙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로 연합군 전사상자가 무려 25만 2000명에 이르렀으며, 터키군 사상자도 25만 1000명이나 되었다. 사망자 수는 비슷하나 다 무너져 가는 오스만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한 세계 최강 영국군과 연합군의 오판을 깨어버린 튀르키예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투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 두명이 등장한다. 한 명은 윈스턴 처칠이다. 작전계획을 세운 것도 의회의 승인의 받은 것도 처칠이었다.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처칠은 엄청난 비난에 휩싸인다. 또 다른 한 명은 무스타파 케밀이다. 후에 아타튀르크로 불리는 튀르키예 국부이다. 당시 대령이었던 무스타파 케말은 세계최강 영국군을 상대로 한 이 전투의 승리로 터키의 영웅으로 떠 오른다. 후에 이 명성을 바탕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근대공화국 튀르키예를 세울 수 있었다.
튀르키예는 수 많은 조형물과 박물관을 세워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갈리폴리 전투의 승리를 튀르키예인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지 알 수 있다. 이 전투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던 비유럽 국가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갈리폴리 상륙작전에는 영국의 요청에 따라 호주와 뉴질랜드 군대도 참전한다. 이 전투에서 안작(ANZAC) 이라 불리는 호주 뉴질랜드 병력 1만명 이상이 전사하였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총 사상자 22만명, 그 중 사망자만 10만에 이르렀다. 당시 호주와 뉴질랜드의 인구를 다 합쳐도 5~6백만 정도밖에 안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젊은세대 20%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이다. 결국 엄청난 인적 피해를 본 호주와 뉴질랜드는 본국 영국에 대해 더 많은 권한을 줄 것을 요구했고, 결국 외교권과 군사권까지 가진 독립국이 되는 발판을 마련한다. 역시 역사의 양면성다.
배를 타고 차낙칼레로 넘어간다. 차낙칼레는 튀르키예 북쪽의 휴양도시이다. 튀르키예의 유명한 휴양 도시는 대부분 에게해 연안인 서남쪽에 많다. 터키를 관통하는 다르다넬스 해협부터 보르포러스 해협에 이르는 바다는 수심도 깊고 물살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휴양지를 만들기 적절치 않다. 그나마 차날칼레는 도시 서쪽이 에게해에 면해 있다.
유럽여행 오면 꼭 하게 되는 것이 렌터카를 배에 싣고 바다는 건너는 일인 것 같다. 아무래도 지중해는 반도가 많은 복잡한 지형이다 보니 때때로 배를 타는 것이 휠씬 효과적이다. 조금 먼 항해를 할 때는 배에서 숙박하며 지중해 일몰을 바라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가끔은 전기밥솥에 라면을 끓여 안주를 삼기도 한다^^ 2006년 이탈리아 중부도시 바리에서 아드리아해를 건너 크로아티아 드브로브닉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배는 이미 출항을 해버렸고 하루를 기다려야 했던 일행은 드브로브닉 아래 쪽에 있는 알바니아의 생진(Shengjin)으로 가기로 한다. 12시간 행해 끝에 도착한 생진, 그런데 세관에서 일행을 내보내 주지 않는다. 컴퓨터도 없이 전화와 펜으로 업무를 보는 생진의 세관은 이 항구에 처음 도착한 한국인을 보고 어쩔줄을 몰라한다. 처음보는 이 한국인들을 비자없이 입국을 시켜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 일행은 이미 입국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지만 한나절을 기다린 끝에 간신히 입국할 수 있었다.
트로이 유적 바로 앞에 자리잡은 트로이 캠핑장으로 행한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 끝에 있는 재료 다 털어서 부대찌게를 끓인다. 예의상 주인 아저씨에에게 한 그릇 드렸더니 맛있게 잘 드신다. 부대찌게의 뜻을 알려주니 재미있어 한다. 뭐 튀르키예사람들도 많이 먹는 햄 소세지로 만들었으니 그리 거부감은 없으리라. 그럼 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은 무엇일까? 물론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니 무엇이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한 때는 불고기가 외국인들의 선호음식 1위기도 했다. 그런데 불고기는 양념 맛으로 먹는 음식이다. 처음에 먹으면 양념 때문에 맛있다고 느끼지만 많이 먹으면 좀 질린다. 라면을 좋아하는 외국인도 많다. 그래도 지금 외국인 선호 한국음식 1위는 단연코 삼겹살이 아닐까. 처음에는 기름기 많은 삼겹살 고기에 기겁을 하기도 하지만 불판에 구워먹는 삼겹살에 매료되면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아쉽게 터키에는 돼지고기 구하기가 쉽지 않아 삼겹살 맛을 볼 수가 없었다.
다음날 트로이로 향한다. 들어서자 마자 재현해 놓은 트로이 목마가 보인다. 아니 저렇게 유치할 수가..... 관광객이 올라가 사진을 찍으라고 만든 것이 라지만 보는 이의 헛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물론 실재 트로이의 목마상이 어떻게 생긴 줄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리스인들이 저렇게 목마를 만들었다면 트로이인들은 신을 모독했다고 화가 나서 불태워버리지 않았을까^^
차라리 브레트피트 주연의 허리우드 영화 트로이에 출현^^했던 목마가 휠씬 더 그럴듯해 보인다. 영화 소품으로 사용 후 터키에 기증하여 차낙칼레에 전시되고 있다.
트로이 입구로 들어 선다. 장구한 역사의 현장, 호메로스 일리아스의 역사적무대. 트로이에 대해 알아보자
트로이는 스카만데르 강 북쪽과 헬레스폰트 해협의 남쪽 어귀로부터 약 6.4km 떨어진 트로아스 평야에 있었다. 트로이 전설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으며, 호메로스 서사시의 근간을 이룬다. 광활한 유적 덕분에 트로이는 고대세계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적지가 되었다.
트로이는 BC 3000~2000년에 번성한 문화 중심지로서, 트로아스의 농업 공동체들을 지배하던 왕권의 수도였다. 그리스에 패망 후 BC 1100년 경에 버려졌다가 BC 700년경에 그리스 정착민들이 트로아스를 차지하기 시작하여 다시 사람들이 살게 되었고 일리온이라는 이름으로 4세기까지 존속했다. BC 6세기말부터 이 지역은 페르시아인, 알렉산드로스 대왕, 아시아 남서부의 셀레우코스 왕조, 페르가몬 왕국, 로마인들에 차례로 점령당했다. BC 85년 로마인이 약탈한 후 같은 해에 로마 장군 술라가 부분적으로 복구시켰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다른 황제들이 많은 애정을 기울였다. 그러나 324년에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되고 나서 일리온은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갔다.
- 다음백과 편집-
여기저기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 하나도 트로이 문명의 수준을 느끼게 한다. 트로이는 5000년 역사의 도시이다. 지금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무려 아홉개의 도시가 이 자리에서 흥망성쇄를 겪었다. 기원전 3600년에 시작해 기원 후 500년까지 4100년의 시차를 주고 도시가 건설되고 파괴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의 무대는 기원전 12세기이다. 도시의 순서로 보면 6번째 도시인데, 19세기 확인되기 까지는 신화라 치부되던 문명이다. 투르크인들이 히사를리크라고 불렀고 그리스·로마 시대의 일리온 유적을 포함한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졌던 구릉이, 1822년 찰스 맥라렌에 의해 호메로스 시대의 트로이 소재지로 밝혀진다. 이후 하인리히 슐라이만에 의해 1870년부터 발굴이 시작된다. 1890년 슐리만이 죽은 뒤에도 그의 동료인 빌헤름 되르펠트에 의해(1893~94) 발굴작업이 계속되었다. 슐라이만과 되르펠트는 집들이 건설되어 사람들이 살다가 마침내는 파괴되어 버린 아홉 기(紀)를 나타내는 9개 주요지층의 순서를 밝혀냈다. 그러나 술라이만은 보물에만 집착하여 100여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유적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그 과정에서 유적층이 크게 파손되고 뒤엉켜 어느 것이 누구의 유물인지 알 수 없게 된 것도 많다. 심지어 자신이 찾고자 했던 트로이 유적도 크게 훼손하였다. 그리고 오스만 정부와의 약속을 어기고 유물을 독일로 밀반출하기도 하였다. 그나마 1930년대 신시내티 대학의 체계적인 발굴 덕분에 지금의 모습이라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제일 아래 있는 1도시의 흔적은 흙벽돌로 남아 있다. 제1~5기는 청동기시대 초기(BC 3000경~1900)로 분류한다. 이 시기 주민들은 아나톨리아 남서부 또는 시리아로부터 와 에게 해 제도, 키클라데스 제도, 미노아 문명의 크레타 섬, 그리스 본토에 살던 주민들의 선조였을 것이로 추정된다. 트로이 제6·7기는 청동기시대 중기와 말기(BC 1900경~1100)에 해당한다. 불과 한 세대 동안 지속되었던 제7a기는 BC 13세기경 발생한 화재로 파괴되었는데, 아마도 이때의 트로이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Iliad〉에 묘사된 프리아모스 왕의 도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의 파괴 이후 약 400년간 이곳은 사실상 버려졌다. 그리스인이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제8기이며,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일리온은 제9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트로이 유적은 남아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올라갈 성채도 그리스연합군이 진을 쳤던 해안도 없다. 현재도 발굴 중이지만 드러난 유적들은 명성에 비해서는 초라한 수준이다. 아마도 9도시가 파괴되어 버려진 후 워낙 많은 시간이 흐른 탓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은 이 트로이에 와서 많은 감흥을 느낀다. 내 세울 역사가 그리 많지 않은 유럽인들은 그리스 로마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여긴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과 가문들은 특히 로마의 상징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내세운다. 심지어 미국조차 로마의 상징인 독수리를 자신들 국가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트로이는 이 그리스 로마문명의 시원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그들은 '일리어스'에 열광한다.
트로이는 일리어스의 무대이다. BC 8세기에 쓰여진 호메로스 '일리어스' 는 고대 서양 최초의 문학 작품이다. '일리어스' 라는 말은 트로이의 성을 의미하는 '일리오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리어스'는 10년간 진행된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51일을 그린 대서사시이다. '일리어스'는 유럽인의 정신과 사상의 원류되는 정신적 모태이자 출발점이다. 그리스 알렉산도로스 대왕도 '일리어스'를 읽고 동방원정을 결심했다. BC 334년 알렉산도로스 대왕은 동방원정길에 아킬레우스의 무덤을 참배한다. 그리고 트로이 왕의 묘에도 참배하며 왕을 죽게 만든 자신의 조상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고 전해진다. BC 48년에는 로마의 카이사르도 트로이를 방문했고 70년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이곳을 방문한다. 유럽인들에게 트로이는 영웅들의 피와 영혼이 서려있는 성지라고 할 수 있다.
'트로이 성의 이야기' 라는 뜻의 이 책의 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책도 [아킬레우스의 분노] 라는 장으로 시작된다. 탐욕스러운 미케네왕 아가멤돈이 자신이 아끼는 여자 노예를 뺏앗아 가버리자 아킬레우스는 분노한다. 그리고 트로이 전쟁에 불참을 선언하는 장면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아킬레우스가 빠진 그리스 연합군은 핵토르의 트로이에 연전연패한다. 결국 아킬레우스의 친구이자 심복 파트로클레스는 아킬레우스의 복장으로 전투에 참가하지만 핵토르 칼에 죽임을 당한다. 이에 또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전쟁 참가를 선언한다. 토로이성 남문 앞에서 아킬레우스를 상대하게 된 핵토르. 최고의 전사 핵토르도 아킬레우스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싸움, 핵토르의 아내도 아버지로 그의 출전을 묵묵히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누가 죽던 시체는 돌려주자는 핵토르의 제안도 거절한다. 결국 핵토르는 아킬레우스의 칼에 쓰러지고 분노가 풀리지 않은 아킬레우스는 핵토르의 시체를 전차에 매달고 12일 간이나 끌고 다닌다. 자식의 비참한 죽음과 시체의 참혹한 유린을 지켜봐야 했던 핵토르의 아버지는 죽음을 무릅쓰고 아킬레우스 진영에 몰래 들어가 무릅을 꿇고 시체만은 돌려달라고 간청한다. 늙은 아버지 눈물의 호소에 분노가 사그러든 아킬레우스는 핵토르의 시체를 돌려주고 안전하게 돌아가도록 호위까지 해준다.
24권 1만 5천행이나 되는 이 장대한 서사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하여 그 분노가 어떻케 해소되었는지를 보여주며 끝난다. 호머로스가 이야기하는 분노는 무엇일까? 그리스 철학의 모든 가치관은 전쟁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스 철학이 말하는 선(善)도 전쟁에서의 승리였다. 그리고 분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그렇다면 아키레우스의 분노는 개인의 분노를 넘어 인류사적 의미를 갖는 분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알렉산도로스도 카이사르도 '일리어스'를 읽으며 폭력을 합법적이고 명예로운 갈등해소의 방법으로 확신한 것은 아닐까. 실재로 그리스인이 '일리어스'를 보는 눈은 기독교도나 유대인들이 성경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한다.
핵토르의 비장한 죽음은 병사들을 돌똘 뭉치게 만들었다. 10년간 이어진 그리스의 공격에도 트로이는 끄덕없었다. 그럼에도 결국 목마를 이용한 그리스의 속임수에 넘어가 트로이는 멸망하게 된다.
트로이성의 남문 쪽에 서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갓 태어난 아들, 죽음의 길을 가는 남편을 막지 못하는 아내를 뒤로하고 아킬레우스와 결투를 하러 떠나는 핵토르의 비장한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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