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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튀르키예, 서양문명의 시원을 찾아서 1 - 이스탄불

2019-08-05

2019.7.26일부터 20일간 튀르키예를 다녀왔다. 튀르키예에 대해 너무 아는 것이 없어 이것 저것 찾아보다가 느낀 놀람움은 직접 가서 보고 느낀 것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튀르키예 땅 수많은 문명의 장구한 역사, 그리스, 로마 이전 부터 존재했던 놀라운 문명들. 로마를 서양역사의 호수라고 부른다지만 튀르키예  땅은 서양문명의 시원이라고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지금 이 땅의 주인인 튀르키예인들이 자신들 조상의 역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다소 소홀히 다루고 있지만, 길거리 발에 채이는 돌하나에도 유구한 역사가 남아 있다. 튀르키예 땅에는 튀르키예인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해도 다 건사하지 못할 만큼의 많은 문명과 역사가 있었다. 흔히 소아시아라고 불리웠던 이 땅은 기원전 2,30세기 문명은 물론, 현재 그리스 로마의 유적들이 본토보다도 휠신 더 많이 남아 있었다. 

  차를 이스탄불 공항부터 렌트해 튀르키예의 서부지역을 돌기로 한다. 한국의 7배가 넘는 커다란 나라를 20일 만에 전부 다닐 수는 없다. 우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기로 했다. 이스탄불 - 차낙칼레 - 트로이 - 아소스(바바칼레) - 페르가몬 - 에페소스 - 파묵칼레 - 콘야 - 카파도키아 - 샤프란볼루 - 이스탄불. 너무나 넓은 지역을 그것도 도시나 유적지 중심으로 주마간산 식으로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튀르키예사람들 삶의 속살을 알려면 몇번의 방문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늘 그렇듯이 이 모든 도시가 예정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소아시아 반도 혹은 아나톨리아 반도라고 불리우는 이 지역은 서양에서 바라보는 동양의 시작이었다. 동양의 뜻하는 오리엔탈이라는 단어도 바로 아나톨리아에서 파생된 것이다.   

비행기 스크린에 비치는 카스피해

비행기 좌석 화면에 카스피해가 보인다. 세계 최대의 갖혀있는 바다. 어렸을때 지도 보기를 좋아했던 나는 카스피해를 세계에서 제일 큰 호수라고 생각했다. 흑해가 보스포러스 해협만 막혀있으면 더 큰 호수가 되었을 텐데 하면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흑해 연안에 사는 사람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이야기지만 어렸을 때 누구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기네스북 열풍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카스피해는 바다이며 제일 큰 호수는 바이칼 호수, 그리고 바다와 호수를 구분하는 것은 민물과 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까지 카스피해를 가 보지는 못했다. 다음는 꼭 가봐야 할 것 같다. 물론 카스피해에서 많이 나는 케비어를 먹고 싶어서는 아니다 ^^  저녁 9시 넘은 시각 이스탄불에 도착한다. 바로 허츠랜터카로 행한다. 랜터카 업체의 영업시간때문에 걱정했는데 확인해보니 24시간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대략 70만원에 14일간 차를 빌리기로 예약했다. 차량을 인수 받으려니 보험이 없고 세금도 빠져 있다고 한다. 다 포함해서 가격을 물어보니 대략 130만원이 넘었다. 이것들이..... 보험 세금 다 빼고 이런 식으로 견적을 내고 예약을 받는 건 처음이다. 거의 사기를 당한 느낌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제와서 다른 곳을 예약할 수도 없고.... 울며 겨자먹기로 차량을 인수한다. 차량을 마구 험하게 다루겠다는 전의가 불타오른다 ^^  

차이. 인도에서 넘어온 차문화의 일부

.한국분이 하는 민박집으로 향한다. 이것 저것 정보도 얻고 여행루트도 점검하는 데 유리해 보였기 때문이다. 늘 그렇지만 미리 만들어 놓은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이다.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보완하고 조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아침에 민박집을 나와 보니 차량 옆에 식당이 보인다. 식당에 들어가 차를 한잔 하기로 한다. 터키 어디를 가나 모든 사람들이 늘 마시는 차, 이름도 차에서 유래해 차이라고 불린다. 튀르키예의 차이는 19세기 후반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에서 전해졌다. 그리 오래된 전통음료는 아니지만 아주 빠르게 터키인들에게 자리잡았다. 진한 붉은색이 특징이며 맛은 홍차와 우롱차의 중간 정도이다. 튀르키예의 하루는 차이로 시작해 차이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튀르키예인들은 보통 하루에 15~20잔을 마신다. 설탕을 넣어서 달달하게 먹는 것이 특징인데  튀르키예 여행에서 반드시 마셔봐야 하는 음료이다. 튀르키예  어디서나 차이와 함께 그들의 정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확인해보니 이 식당은 음식만 파는 식당은 아니란다. 그럼 무엇을 파나?  튀르키예인들, 주로 남자 노인들이 모여서 차를 마시고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숫자놀이를 한다. 일종의 보드게임으로 보이는데, 점심 즈음이면 마을 노인들이 모여 저녁시간 전까지 혹은 밤까지 소일거리로 게임을 한다. 이런 카페는 터키 어느 지역에서나 지역 사랑방 구실을 하며 노인들의 무료한 시간을 달래주고 있다. 아무 할 일이 없어 동네 벤치에 삼삼오오 모여 담배피면서 소일하는 한국의 노인들보다는 휠씬 더 좋아 보인다. 한국에서도 지역단위나 마을, 동네 등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카페를 열고 이 카페에서 다양한 놀이와 간단히 요기 거리를 제공해주면 좋을 것 같다. 노인들이 늘어 날 수밖에 없는 한국 인구 구조상 사업 아이템으로도  좋을 것 같다. 사업성이 떨어지면 지자체에서 노인 복지 관련된 기금을 약간 지원해 줘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아야소피아

차 한잔을 마시고 이스탄불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 아야소피아로 행한다. 아야소피아는 러시아 정교 성당으로 지어져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진 후에는 모스크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아야소피아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비잔티움 예술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니카의 반란(532)으로 불타 버린 것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재건하였다. 성 소피아 성당은 황제의 대관식, 전승 기념 등의 행사에 사용되었으며, 정사각형의 벽 위에 원형의 돔을 올려놓는 비잔티움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준다. 내부는 대리석 기둥과 모자이크, 금박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중앙을 차지하는 돔은 지름이 31m나 된다. 네 개의 첨탑(미나레트)과 내부의 아랍어 장식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점령 이후에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면서 세워진 것이다. 이슬람 점령 이후 대부분 파괴된 다른 성당들과 달리 횟칠 덕분에 벽화까지 보존되어 있는 몇 안 되는 성당이다. 튀르키예어로 아야소피아로 불리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어떠한 종교 행위도 금지되고 있다.
                                                       - 다음 백과사전 편집 -

아야소피아 장엄한 내부

사실 유럽을 여행하면서 처음에 가장 많이 놀라는 것은 도시마다 있는 교회의 규모이다. 건설하는데 짧게는 100년에는 길게는 수백년의 역사까지 더해져 처음보는 사람에게 많은 감동을 준다. 그런데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다 보면 불현듯 도시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교회가 어느 도시나 비슷하다는 것을 깨 닫는다. 교회의 모습이 좀 다르다고는 하지만 처음에 느껴던 감동은 사라지고 도시 중심의 교회네 하는 생각만 남는다. 사람마다 좀 다를 수는 있겠지만 처음의 감동이 약해지는 것은 누구나 경험할 것이다. 결국 세월이 흘러도 보면 볼 수록 감동을 더해가는 자연과는 좀 다른 것 같다. 그나마 나에게 아야소피아성당은 그 규모와  화려함, 1500년의 역사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탄식이 들리는 듯 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소아시아 전부와 유럽의 턱밑까지 점령한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마지막 남은 비잔틴 제국의 보루 콘스탄티노플을 바라본다. 점령 준비에 착수한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4월 5일 콘스탄티노플 성문에 도착한다. 술탄은 이슬람 전통에 따라 마흐무드 파샤를 비잔틴 황제에게 보내 유혈 충돌 없는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가 요구를 거부하자, 대포를 쏘며 공격을 시작한다. 48일 동안 밤낮으로 결사 항전하며 버티던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더 이상 제국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성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가 조용히 하느님에게 기도한다. 이 교도의 침략으로 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지켜달라고. 그러나 1128년을 지탱해 온 제국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453년 5월 29일 화요일 새벽 1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향해 총공세를 시작했다. 그리고 해상에서도 오스만 함대가 보스포러스를 따라 골든혼 진입을 시도했다. 쇠사슬로 연결된 골든혼을 돌파하기 어렵자, 술탄은 밤사이에 전함 67척을 육지로 옮겼다. 배 밑에 기름을 친 둥근 목재를 깔고 언덕을 넘어 골든혼 안쪽에 함대를 진입시키는 누구도 상상 못한 전술을 생각해 낸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항복 대신 성안의 시민들과 함께 최후까지 장렬하게 저항했다. 병력은 그리스인 4,983명, 용병 2,000명 남짓이 전부였다. 7,000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메흐메트 2세가 직접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의 정예군 10만 명을 상대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의 말발굽에 무너지며 그 장구의 역사를 마감한다.

  그럼 왜 콘스탄티노플을 지키는 병력이 7000명밖에 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용병을 비롯한 군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군대가 언제 자신들에게 칼을 돌릴지 모르다는 우려는 십자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1204년 신의 군대이며 성지 회복한다는 이름으로 결집한 4차 십자군은 거꾸로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를 침공하여 무자비하게 도시를 약탈했다. 이후 많은 수의 군대가 도시안에 주둔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적은 병력으로 도시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은 콘스탄티노플을 감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에서 비롯되었다. 

3중으로 세워진 성벽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이어져 온 성벽과 콘스탄티누스대제가 직접 세운 성벽이 있었으나, 시가지가 너무 커져 이 성벽들로는 시가지를 충분히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에 테오도시우스 2세는 시가지를 보호하고 방위하기 위해 서기 413년부터 성벽을 건설하게 된다. 이 성벽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살펴보자.

 

성벽은 해자를 갖추고 있는 성벽으로, 해자 뒤의 흉벽과 너비가 2미터, 높이가 5미터인 내성벽, 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인 외성벽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 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플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육로에 면한 6km정도만이 앞서 설명한 구조로 되어있었고 해안가의 성벽은 보통의 단일구조로 되어있었다.

성벽의 위력은 매우 강력했다. 제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수도 면전까지 영토가 유린되었다 해도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15세기까지는. 1453년 오스만군도 10만에 달하는 대군을 몰고 왔으나 성내의 7천 남짓한 군대를 상대로 한 달 반 가량을 고전해야 했으며, 간신히 넘어 수도를 장악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성벽을 넘어온 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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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00명의 군으로 10만의 대군에 맞서 무려 48일을 견디어 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위력을 증명하고 남음이다. 그런데 무려 48일간 오스만 군대에 맞서 싸우고 있는 콘스탄티노플의 소식이 서유럽에 전해졌을 것이다. 서유럽의 나라들은 이 소식을 듣고도 왜 콘스탄티노플을 도와주려 하지 않았을까?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등 많은 사건들로 여력이 없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서유럽이 비잔티제국을 돕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비잔틴제국이 그리스 정교를 신봉하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기독교 정통성을 다투며 경쟁하는 관계인 비잔틴제국, 서유럽과 로마교황청은 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친다. 1200년 역사를 지닌 비잔틴제국은 그렇게 멸망하고 동지중해와 발칸반도는 오스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문화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 고전학 연구 학자들이 대거 서유럽으로 망명하고 결국 서유럽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누구의 입장에서든 역사는 언제나 양면성이 있다.    

방치되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2000년의 역사도시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문화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성벽이라고 할 수 있있다. 그런데 현재의 관리상태는 엉망이었다. 터키 당국은 자신들 조상의 유산이 아니라는 이유, 그리고 재정부족으로 그냥 방치하고 있다. 그 사이 성벽은 끊임없이 훼손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으며 심지어 성벽 사이에 많은 노숙자들이 기거하며 성벽을 훼손하고 있다. 또 부서진 성벽에 대한 보수도 거의 진행하지 않아 흉물처럼 방치되고 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이다. 더 늦기전에 종합적인 보존대책이 나와야 할 것으로 보인다.   

푸른 빛의 타일이 사용되어 블루모스크로 불린다

아야소피아성당 건너편에 블루모스크가 보인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아야소피아성당을 모스크로 만들었지만 비잔틴 제국의 대표적 유적이 이스탄불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이 불만인  아흐메트 1세는 아야소피아성당 맞은 편에 새로운 모스크 건설을 명령한다. 이 명령에 따라 1609년 부터 착공에 들어가 7년이란 공사 끝에 1616년 완성되었다. 이 모스크의 정식명칭은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이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모스크 안 벽면을 뒤덮은 푸른빛을 띠는 도자기 타일 때문에 블루모스크 애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수공사 중이라 그 전체 면면을 다 확인 할 수는 없었지만 석재가 떨어져 나가고 변색된 부분도 많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 라는 별칭이 쑥스러워 보인다. 오히려 다음날 가본 슐레이만 모스크가 휠씬 더 아름다워 보인가. 늘 같이 여행다니는 병준이가 자세를 잡고 있다. 요즘 병준이와 여름 겨울 여행을 같이다니고 있다. 혼자서 여행을 다나면 인물 사진을 찍을 일이 별로 없다. 사진 찍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사진을 글을 쓰는 재료로 활용하다 보니 인물이 들어간 사진이 적절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도 병준와 재필이 덕에 사진을 몇장은 건졌다.

가장 아름다운 슐레이만 모스크

슐레이만 모스크는 블루모스크보다 60년 정도 먼저 건설된 모스크로서 이스탄불 대학의 북쪽, 골든혼을 조망할 수 있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사원으로 꼽힌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제10대 술탄 슐레이만 1세 때,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1550년부터 1557년까지 7년에 걸쳐 건립하였다.
4개의 첨탑, 돔과 예배당 건물 등을 비롯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 병원 및 하디스(hadith) 교리를 배우는 전문학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뒤뜰에는 술탄 슐레이만 1세와 그의 아내와 딸의 묘지를 포함한 두 개의 영묘가 있다.

내부도 무척 아름다운 돔을 가지고 있다. 사진을 찍지말라고 하는데 내부가 너무 아름다워 몰래 도촬까지 감행해 본다. 이 모스크에서 내려다보는 골드혼의 풍광도 일품이고 특히 일몰시간에 더욱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블루모스크보다 관람객도 휠씬 적고 심지어는 입장료도 내지 않는다^^ 시간이 부족해 하나의 모스크만 구경해야 한다고 슐레이만 모스크를 적극 추천한다.

이스탄불 시민의 발 트램

트램이 보인다. 트램은 굉장히 효율적인 교통수단이다. 평지에 있어 이용의 편리성이 높고 매연도 배출하지 않으며 선로를 자동차와 같이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가지 단점은 있다. 이용할 수 있는 승객의 수가 제한적이다. 일반 지하철에 비하면 이용 가능한 승객수는 5분의 1 수준이다. 즉 이스탄불같은 인구 천만의 대도시에는 그리 효율적인 교툥수단은 아니라는 예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램을 건설할 수밖에 없는 고민이 있다. 그것은 2000년 된 도시때문이다. 모든 땅이 유적지인 관계로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온다. 지하철을 건설할 수 없는 이유이다. 같은 이유로 로마도 지하철을 거의 만들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대전이나 화성에서 트램 건설을 추진 중이다. 서울이나 부산같은 대도시에는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이스탄불 시내 낮 구경을 마치고 현지의 식당으로 향한다. 여행의 진정한 재미는 밤에 있다고 했나. 현지음식을 먹으며 현지인들과 어울리는 재미가 진정한 여행의 참맛일 것이다.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민박집 아주머니가 추천한 식당가로 향한다. 다양한 식당이 보여, 상의 끝에 해산물 식당으로 향한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영어가 전혀 안 통하고 메뉴도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가게 주인이 무엇인가를 가져온다.    

음식이 있는 진짜 메뉴판이다

이 식당에서 파는 메뉴 전체를 조금씩 담아서 보여준다. 이런 기발한 방법이^^ 말그대로 살아있는 실제의 메뉴판 되겠다. 보통 튀르키예하면 케밥만 생각하지만 튀르키예는 세계3대 음식 대국으로 꼽힌다. 향과 재료도 한국사람 입맛에 잘 맞아 저렴한 물가와 더불어서 많은 즐거움을 준다. 몇가지 유명한 음식만 꼽아보자. 터키 음료 차이와 같이 먹는 터키 국민빵 시미트, 터키를 대표하는 케밥은 그 종류만도 2,300가지에 이른다. 그 중에서도 고등어 케밥 '발륵 에크멕' 은 별미 중에 별미다. 짭짤하게 먹는 수제요구르트 아이란과 캬라멜처럼 생긴 로쿰은 대표적인 디저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떡갈비와 유사한 쾨프테도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모든 요리에 빠지는 않는 샐러드 살리타도 가히 튀르키예 국민 샐러드라 할만하다.

튀르키예 국민주

여행에서 빠지면 안 되는 또 하나의 메뉴는 술이다. 어느 나라든 자신들의 전통주를 가지고 있고 여행가서 그 나라 전통주를 마셔보는 즐거움도 여행의 재미를 배가시켜 준다. 또 술을 마시면 긴장이 풀어지고 현지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기회를 준다. 더듬더듬 어눌한 영어도 술 한잔을 하며 청산유수로 쏟아져 나온다^^ 이번에 마신 술은 터키 전통주인 라키다. 포도를 발효시킨 원료를 증류한 술로 4,50 도 정도이며 강한 향이 특징이다. 아니스 향이라고 하는데 미나리 혹은 드라이진 비슷한 향이 난다. 일명 사자의 젓이라고 불리는데 물에 섞으면 불투명한 우윳빛 술로 변하게 된다. 처음에는 와인의 찌꺼기를 증류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향이 강해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리며 튀르키예 주당들이 좋아하는 술이다.    

이스탄불 시민인 갑장 애담

 왁자지껄 떠들며 먹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튀르키예인이 아는 채를 한다. 눈인사를 하고 몇 마디 나눈자 대뜸 몇살이냐고 물어본다. 이런! 초면에 나이를 물어봐... 하면서 몇 살이라고 하니 갑자기 엄청 놀라는 눈치다. 넌 몇 살이냐고 물어보니 우리보다 한살 어리단다^^ 다시 확인해보니 동갑이다. 이름은 애담이라고 하는데 머리가 없어서 인지 좀 나이가 들어 보인다. 서양인들은 특히 동양인의 나이를 잘 모른다. 아무래도 얼굴이 평면적이고 머리숫도 많아서 좀 더 젊게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토종 이스탄불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애덤과 갑장 친구같은 단어를 알려주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간다.       

이스탄불 시민의 배표적 낚시터 갈라타 다리

다음날 유람선을 타기로 한다. 쏟아지는 햇살을 피해 보트 안의 그늘을 찾아 자리를 잡는다. 유람선이 이스탄불을 가장 유명한 선착장인 에미노뉴를 떠나 보스포러스 헤협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한다. 갈라타 다리가 보인다. 골드혼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다리는 6세기 유스티아누스 1세 때 언급이 보이며 임시 부교의 형태였다. 지금 보이는 다리는 다섯번째인인데, 현재 위치에 터키의 건설회사가 네번째 다리가 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지었다. 1994년 12월에 완공됐다. 길이 490m, 주경간 80m의 도개교이다. 현재는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를 즐기는 터키인들로 유명하고, 이 모습을 지켜보고 도시의 경치를 감상하고자 하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그런데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를 즐기는 터키인들은 레저가 아니라 생업으로 낚시를 한다고 한다. 저렇게 해서 생업이 유지될까 싶지만 다들 여유롭게 낚시에 몰입한다.

돌마바흐체궁전

조금 올라가니 돌마바흐체 궁전이 보인다. 돌마바흐제 궁전은 19세기 중엽, 서구화를 통해 국운이 기울어 가던 오스만제국의 부흥을 꾀했던 압둘 메지드 1세가 건설한 궁전이다. 오스만 제국의 부흥을 어떻게 화려한 궁전으로 꾀할까 의문이 든다. 참 바보같은 생각이다. 차라리 그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군대를 육성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그런데 한가지 역설이 있다. 중국 청나라말의 실권자 서태후는 북양함대를 만들 돈으로 자신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을 건설한다. 외적에 맞써 싸울 군함 건조 비용을 개인별장 건설로 써버린 것이다. 당연히 서태후는 당대는 물론 후세에도 엄청난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서태후가 예정대로 북양함대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국은 북양함대로 서방을 물리치고 반식민지로 전락되는 것을 막았을까? 역사의 가정은 의미 없지만 설령 북양함대가 있어어도 중국의 현실이 그리 녹녹치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북양함대는 대부분 바다에 가라 앉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나마 이화원이라도 만들어서 지금 많은 관광객들이 관람하는 유적지로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돌마바흐체 궁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역시 역사는 양면성이 있다.  

돌마바흐체입구

돌마바흐체 궁전은 이이스탄불 신시가지의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한다. 돌마바흐체의 돌마는 터키어로 '꽉 찼다'는 의미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작은 만을 메우고 정원을 조성해 '가득 찬 정원'을 뜻하는 돌마바흐체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해안을 따라 600m가량 길게 뻗어 있어 '바다 위의 궁전'이라고도 불린다.돌마바흐체 궁전이 있는 자리는 1453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을 공략하기 위해 배 67척을 육지로 끌어 올린 바로 그 자리이다. 압둘 메지드 1세는 이 자리에 돌마바흐체를 지으며 메흐메트2세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현실은 정반대로 진행되었다.

한편 돌마바흐체 궁전의 모든 시계가 9시 5분을 가리킨 채로 멈춰 있어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의 사망 시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는데 아타튀르크는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 집무 중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아타튀르크의 서거일이나 주요 국경일에는 아타튀르크가 머물던 당시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방을 특별히 공개하기도 한다.

유람선을 타면 잘 보이는 모스크

  뷔익 메디지예 모스크가 보인다. 돌바바흐체 궁전 바로 옆에 있으며 아주 아름다운 모스크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을 설계한 건축가의 작품이며 바닷가에 면해있어 좀 더 멋진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이 지역을 베타식스라고 하는데 이스탄불 최악의 교통체증구간이다. 해안을 따라 있는 좁은 도로는 말그대로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커다란 대도시가 그리 많지 않은 유럽에서 손곱히는 대도시인 이스탄불의 교통체증은 단연코 유럽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터키 경제가 발전하면서 빠르게 자동차가 늘고 있다. 유적지 때문에 도로를 건설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언덕도 많아 도로 확장도 여의치 않다. 무엇인가 획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위해 건설한 루멜리 히사리

유람선은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 다리' 에서 돌아선다.다리 옆으로 루멜리 히사리가 보인가. 루멜리 히사리는  보스포러스해협의 유럽 쪽에 지어진 요새이다. 1452년 당시 보스포러스해협을 관할하던 비잔틴제국 함대가 북쪽 동맹국과 교통하는 것을 막기 위해, 메흐메드2세가 해협의 폭이 가장 좁은 700m 병목구간에 건설했다. 석공 1만 명과 인부 1만 명을 동원하여 139일 만에 지었다는 성채이다, 계단식 성곽으로 되어 있으며 5~15m에 이르는 거대한 첨탑 5개가 서로 연결되어 어느 탑에 오르더라도 전체를 다 돌아볼 수 있다. 건너편의 아시아 쪽에 있는 아나톨리 히사리 함께 서로 해협을 지나는 모든 선박들을 감시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보스포러스 해협을 관할하는 것이 목적이다. 결국 메흐메드2세는 1453년에 양쪽 요새에서 보스포루스해협을 타고 들어오는 비잔틴 제국의 함선을 협공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성공한다. 지금 보스포러스 해협은 국제적 통행 자유구간이다. 어느 나라 선박도 자유롭게 통행 할 수 있고 터키는 이를 제지할 수 없다. 터키는 세계 1차대전의 패배, 그리고 터키독립전쟁의 와중에 이스탄불을 지키기 위해 에게해 섬 전부를 그리스에게 할양하고 보수포러스 해협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할 수밖에 없었다. 

유람선에서 하선 후 멋저 보이는 바닷가 카페로 향한다.병준이는 칭따오에서 사업을 하고 있도 재필이는 대전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그런데 여행을 다니다 보니 한국 교사들이 많아서 직업을 말하기가 궁색한 경우가 많다. 색다르게 직업을 바꿔보기로 한다. 성악가 목소리를 가진 재필이는 보이스피싱 전화담당, 나는 보이스피싱 돈세탁담당, 병준이는 보이스피싱 총책으로 직업을 바꾸기로 하고 재미있다고 낄낄거린다. 실재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하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철없는 중년남자 세 녀석이 노느라고 그런다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를 바란다^^   

루멜리페네니 부터 흑해가 시작된다

이스탄불까지 왔는데 흑해를 안 볼수는 없다. 흑해를 보러간다고 하니 민박집 주인아주머니가 장소를 추천해 준다. 보스포러스 해협과 흑해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루멜리 페네니. 루멜리페네니는 작은 어촌마음이다.  이스탄불시내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걸려 한나절에 다녀오기 좋은 곳이다. 루멜리 페네니에는 19세기 프랑스가 건설한 등대와 16세기 코사크의 해적을 막기 위해 건설한 성채가 있다. 관리상태가 엉망이기는 한데 푸른하늘과 흑해, 그리고 성채의 고풍스러움이 어울려 멋진 장면을 만들어 낸다. 터키인들에게도 웨딩사진 같은 이벤트를 많이 하러 오는 곳이다. 성채 넘어 흑해가 보인다. 바닷물의 색이 검해서 흑해라고 불리는 곳.

바다가 그렇게 검게 보이지는 않는다

동서 길이 1,150km. 남북 최대 길이 610km. 면적은 41만 3,000km.로 한반도의 2배에 이르른다.  최대수심 2,212m. 유럽 지중해의 에게해와는 보스포루스 해협·마르마라해·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이어져 있다. 흑해는 검은 빛깔을 띠며 아름다운 것에 비해 바다 환경이 좋지는 않다. 빙하가 물러가면서 만들어 놓은 황화수소가 지표층에 깔려있고, 용해된 산소가 없고 황화수소로 포화된 상태이다. 때문에 수심 150m 아래서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

그런데 흑해라는 이름은 바다의 색깔, 빛의 투과 정도나, 박테리아의 종류로 인해 붙여진 것이 아니고, 다른 이유로 붙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15세기 오스만이 진주하고 나서야 흑해라 불렸기 때문이다. 흑해를 터키어로 하면 karadeniz(검은 바다)가 되는데, 여기서 검다는 뜻의 'kara'는 단순히 검은 것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튀르크족의 관점에서 검은색, 즉 '북쪽'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러한 터키어 단어가 번역되어 다른 유럽국가들에 알려지는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아는 '흑해'의 의미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 이제 흑해까지 봤으니 남쪽으로 이동할 차레이다. 차낙칼레를 거쳐 트로이로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