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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튀르키예, 서양문명의 시원을 찾아서 4 - 에페수스

2019.10.17

에페수스로 가는 길, 에게해 연안을 따라 내려간다. 터키 서쪽에는 많은 휴양지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 한낮에는 40 도 가까이 올라가지만 저녁에는 25도 이하로 떨어져 아주 쾌적하다. 지중해성 기후는 겨울에는 온화하고 강수량이 많은 반면, 여름에는 아열대 고압대의 영향으로 기온이 매우 높고 건조하다. 여름철 월평균 기온은 20~27℃ 정도이고, 겨울철 월평균 기온은 5~10℃ 정도이다. 같은 위도의 지역보다 연교차가 작고 겨울이 따뜻한 편이다. 

유럽지역의 축구시즌은 여름이 끝나갈 때 시작해서 겨울을 거쳐 봄에 끝난다. 건조하다고 하지만 한 여름에 축구하기는 너무 뜨겁다. 반대로 우리는 겨울에 축구하기 너무 춥다. 추우면 근육이 굳어져 부상의 위험도 많아진다. 따라서 우리는 30도가 넘어가는 한 여름에도 축구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유럽보다 축구를 못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전기 밥통에 몇가지 재료만 넣은 비빔밥

조그만 휴양도시 해안가에 차를 세우고 식사를 한다. 아침에 해 온 전기밥솥 밥에 고추장 참기름 등 몇가지를 넣고 비빔밥을 해 먹는다. 재료는 몇 가지 없지만 맛은 아주 그만이다. 조금 번거로워도 차량이 있으면 전기밥솥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좋다. 쌀이야 어디서든 구할 수 있고 스위치만 누르면 된다. 불을 못 피우는 배에서도 국이나 라면을 끊여먹을 수 있다. 맛도 좋지만 비용도 많이 절약된다. 식사하면서 와인이나 주류 몇 가지를 곁들이면 되니 술 값도 아낄 수 있다. 술 많이 먹는 중년 3명이서 여행을 하다 보면 여행비용의 절반을 술값으로 써버리기도 한다^^ 전기밥솥 덕분인지 나중에 여행 비용을 정산해 보고 깜짝 놀란다. 거의 무전여행 수준으로 돌아다녔다며 셋이서 낄낄 거렸다.  

샐축의 수도교 유적

셀축에 도착 숙소를 잡는다. 셀축은 에페수스 유적이 있는 터키의 도시이다. 규모는 작은 편이고 대부분 관광을 위해 들린다. 에페수스는 터키의 딱 한 군데 유적만 들린다면 당연히 꼽을 정도로 장대한 고대의 유적과 터키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시내에 들러서자 마자 로마시대의 수로 유적이 관광객을 맞는다. 에페수스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역사의 중심지였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 중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 바로 이곳이며, 성모 마리아 집이나 성 요한 교회 등을 만날 수 있어 성지 순례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도시이다.

에르테미스 신전 유적. 기둥이 하나 남아있다

셀축 시내 중심가에 고대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에르테미스 신전이 있다. 전지 전능한 신으로 추앙받던 에르테미스를 추앙하기 위해 기둥 127개의 융장한 규모로 지어진 신전이다.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 세워지기 100년 전인 BC550년 완공되었으며 규모는 2배에 이르렀다. 지금은 신전은 간데없고 기둥 하나만 남아 있다. 그런데 에르테미스신전이 파괴된 것은 지진 같은 자연 재앙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진 박해를 받던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된 후 자신들이 받았던 방식으로 이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한다. 일부 광신도들은 유일신의 힘을 보여준다며 고대 신전을 마구잡이로 파괴했다. 에르테미스 신전뿐 아니라 올림페리온 신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신전, 국립 아고라가 있던 신전도 파괴하였다. 그나마 에르테미스 여신상은 누가 몰래 땅속에 묻어 놓아 화를 면해 지금 에페수스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자신들은 그렇게 모진 박해를 받고 숨어 살며 죽음에 까지 내몰렸다. 그런데 위치가 바뀌자 자신들도 그렇게 돌변해 버리는 그 심리를 무엇일까? 단순한 복수심인가, 독실한 신앙심의 발로인가..... 고대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도처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에페수스 중심 마블 거리

 에페수스는 기후가 온화하고 지형적 여건이 좋아 기원적 5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BC 10세기 그리스계 이오니아 인들이 이곳에 정착해 도시를 세웠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에게 해의 중심 도시로 번성했다. 지리적 위치로 인해 지배세력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바로 로마 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였다. 당시 에페수스는 소아시아 지역 중 가장 중요한 무역항이 되었고, 아시아 지역에서 최고의 도시로 발전했다. 그런데 에페수스 사람들은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들고 군대를 키우는 데 자원을 쓰지 않았다.. 대신 도서관을 세우고 신전을 지어 신의 뜻을 살피고 원형극장에서 시와 음악회를 즐겼다. 군사력보다는 문화와 교육, 여가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그렇다면 에페수스는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동맹의 세력 내로 들어 가는이었다. 즉 리디아와 그리스, 페르시아의 힘이 커질 때마다 스스로 군사력을 키우기 보다는 예속되어 보호받는 방법을 택했다. 자신들이 경제적, 문화적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지배자가 누군인지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페르시아의 무거운 세금에 한 때 저항하기도 했지만 강력한 진압에 금방 꼬리를 내린다. 에페수스는 BC479년 독립을 하게 되는 데, 그것도 그리스 동맹이 페르시아를 물리쳤기 때문이다. 물론 BC386년 그리스 내전으로 고전하던 스파르타가 지배권을 넘겨 페르시아의 지배로 돌아와 버리기도 했다. 변변한 군사력도 없는 인구 50만의 도시국가가 페르시아, 로마 같은 대제국에 맞서서 살아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름대로 터득한 생존의 지혜일 것이다.

화려한 셀수스 도서관

에페수스를 상징하는 유적은 누가 뭐라해도 셀수스 도서관이다. 도서관은 아시아 지역 집정관이었던 셀수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으로 125년에 지은 것이다. 중앙대로인 마블거리와 크레테스 거리가 교차하는 도시의 중심에 자리한 셀수스 도서관은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지금은 일부 앞부분만 남아 있지만 16개의 거대한 코린트식 대리석 기둥과 2층으로 된 웅장한 규모는 보는 이를 압도한다. 아침 햇살이 비친 도서관은 특히 더 아름답다고 한다. 일찍 공부하는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 건물을 동쪽으로 향하게 했기 때문이다. 서고에는 무려 1만 2천 권의 도서가 있었다. 도서 대부분은 습기에 취약한 양피지여서 최적의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벽면을 이중으로 만들었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

도서관 내부 공간은 남아 있지 않은데 뒷편 둥글게 파인 부분에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 상이 서 있었다. 1층 전면에는 8개의 기둥이 있는데, 그 사이에는 지혜, 덕, 사려, 학문의 신상이 차례로 서 있다. 지금 도서관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고 원본은 오스트리아 빈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BC10 세기 건설된 이 도시는 어떻게 군사력이나 성채보다는 교육과 문화 여가에 더 많은 가치를 둘 수 있었을까? 흔히 소프트 파워(Soft power)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는데, 소프트 파워란 무엇인가?

'소프트 파워' 는 하버드대학교 조지프 나이 교수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군사력과 같은 물리적 힘으로 표현되는 '하드파워(Hard power)' 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군사력이 국력의 잦대였다면 21세기 들어서면서 한 국가의 힘은 이성적, 감성적 능력의 창조적 산물과 연관된 분야로 바뀐다는 것이다. 일 찍기 김구선생도 '나의 소원'에서 '높고 새로운 문화의 모범적인 국가'를 언급했다. 지금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문화, 경제, 교육에 초점을 맞춘 소프트 파워를 지향하고 있는데 그 소프트 파워를 3천 년 전 고대도시가 이미 이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종헌  '터키역사기행'   편집               

상업 아고라로 가는 관문

도서관 왼편에 있는 세개의 아치문을 통과하면 각종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과 조각품들이 있다. 그 앞 쪽은 시장이 있었던 '상업아고라' 터다 상업아고라로 나가는 문 오른쪽 벽에는 당시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자세히 적혀 있어 당시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에페수스의 도시 구조 중 재미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도서관 바로 옆에 유곽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 학자들이 유곽의 가장 큰 고객인지, 아니면 도시를 만들다 보니 우연히 유곽이 도서관 옆에 자릴 잡게 되었나는 모르겠다^^ 도서관 정면의 크레테스 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유곽이 하나 더 있고 그 옆에 공중목욕탕이 붙어 있다. 이 목욕탕은 다양한 시설을 구비하고 있으며 남녀 공용이다. 남녀 공용 목욕탕의 매우 오래된 전통인 듯하다. 유럽에는 이 전통 때문인지 지금도 남녀 공용 목욕탕이 존재한다.

2006년 스위스를 갔을 때의 일이다. 호텔 목욕탕을 들어가려구 보니 출입문에 미성년자 출입금지라고 쓰여 있다. 엥! 무신 목욕탕이.... 알고 보니 남녀공용목욕탕이다. 두려움 반 호기심 반 해서 친구들과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척 어색했는데 좀 지나니까 적응이 되기 시작한다. 가운데 메인 홀이 있는 우리나라 찜질방 같은 구조였는데 물론 옷은 다 벗어야 한다^^ 친구가  목욕탕 증기 나오는 스위치를 잘 몰라 헤매자 서양 아줌마 한분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나중에 물어보니 독일 아줌마란다. 그런데 친구가 잘 못 알아듣는다. 그러자 답답했던 아줌마 친구의 손을 덥석 잡는다. 그리고 이방 저 방 끌고 다니며 자세히도 알려준다. 벌거벗고 독일 아줌마 손을 끌려다니는 친구를 보며 다들 자지러 졌다^^ 

공중 화장실

공중목욕탕 옆에 공중 화장실도 같이 있다. 밑에 물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용변을 처리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물이 내려오는 윗 쪽이 조금 더 비싸다고 한다. 심지어 화장실 가운데서는 편안히 용변을 보라고 음악 연주도 했다. 화장실 칸막이 없는 이런 화장실에서 쑥스럽지 않았을까? 물론 '키톤'이라고 불리는 그리스 시대 의복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옷이다. 이런 의복이 아랫부분까지 완벽하게 가려주기는 했을 것이다. 당시의 성에 대한 개방적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공중목욕탕과 공중화장실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4세기 이후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종교적인 엄숙주의가 지배하기 시작하며 이런 문화는 퇴폐, 음란으로 치부되기 시작한다.   

인류최초의 광고판

도서관 옆 유곽 앞에는 한가지 재미있는 대리석판이 남아 있다. 하트 모양과 왕관을 쓴 여인, 그리고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여기는 유곽의 입구, 대략적인 뜻은 이렇다. '여기 오면 여왕 같은 여자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그런데 발은 이것보다는 커야 한다' 미성년자 출입금지라는 말이다. 오늘날로 보면 유곽의 광고판이 란지 아니면 애들은 가라고 했으니 공익광고판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 대리석은 인류최초의 길러리 광고판이라는 것이다^^

원형극장. 당시의 원형극장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에페수스는 1세기에 인구 50만이 살던 도시이다. 발굴을 시작한 지 150년이 되었지만 전체 유적의 15%만이 발굴되었을 뿐이다. 말그대로 그리스와 로마를 능가하는 그리스 로마의 유적이다. 에페소스에는 북쪽 입구와 남쪽 입구가 있다. 당시 사람들은 바닷가 쪽 인 북쪽 입구를 통해 도시를 드나들었다. 북쪽 입구에 들어서면 원형극장이 보인다. BC 100년 경에 지어진 이 원형극장은 무려 25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원형극장이었다. 객석 아래 토관과 청동관을 묻어 공명장치로 활용했다. 지금도 소리가 뒤쪽 끝까지 잘 전달되며 실제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2000년의 숨결을 간직한 이 무대에 서서 공연하는 음악가에게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일 것이다.  

원형극장 맞은 편으로 난 길은 4세 기기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퇴적 범람을 막기 위해 지반을 높여 만든 '아르카디우스 로'이다.  길이 550m 넓이 11m로 도심과 항구를 연결하는 대단히 화려한 도로이다. 에페수스의 주수입원은 무역과 입항료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뱃사람들은 대단히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바닥에 최고급 대리석을 깔고 원주기둥으로 된 회랑을 만들었다. 원주에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조각들을 장식하였고 밤에는 횃불을 켜서 거리를 밝혔다. 세계최초로 가로등을 켠 화려한 거리를 만든 것이다.   

하이드리아누스 신전

셀수스 도서관을 지나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가장 아름다운 신전이라고 블리는 하이드리아누스 황제의 신전이 나온다. 터키 돈 20리라 지폐에 인쇄되어 있는 바로 그 신전이다. 가운데 둥근 아치아치 제일 위에는 악귀를 쫓아주는 메두사가 조각되어 있고 사냥과 전쟁 장면들을 묘사한 부조가 붙어 있다. 신전 뒤쪽으로는 스콜라스티카 목욕탕이 있다.

이렇듯 화려하며 다양한 소프트 파워를 갖춘 에페수스가 쇠퇴하 것은 자연재해도 이 민족의 침입도 아니었다. 전쟁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절, 성벽과 군사력 대신 도서관과 원형극장을 지은 소프트 파워 에페수스는 유목민족들에게 여러 차례 도시를 점령당하고 지진을 비롯한 많은 자연재해를 당해도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그러나 고질적인 퇴적물 문제로 바닷길이 막히며 무역항 항구로서 기능을 상실하며 결정적으로 쇠퇴하게 된다. 천년을 버텨온 유럽의 최강국 베네치아 멸망의 직접적 원인은 나폴레옹의 침략이었다. 그러나 이미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며 독점적인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결국 무역 쇠퇴에 따른 국력의 상실이 베네치아를 망국으로 이끈 것이다. 

일본은 우리에게 국가 간의 약속과 합의 위반을 거론하며 정치적인 문제에 경제와 무역을 끌어들리고 있다. 당연히 한국 경제에 많은 피해가 생기고 있다. 그런데 일본도 잘 알고 있듯이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의 약속이라는 것은 힘의 논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국제관계는 애초부터 정의와 합의가 존중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외교는 총을 안 든 전쟁이고 전쟁은 총을 든 외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일본은 지난 세기 우리에게 이 무도한 힘의 논리를 강요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세월 식민지로 전락하며 이 교훈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일본은 스스로에게도 피해가 가는 무역 제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무역 제재나 스스로의 봉쇄가 어떠한 결과로 이어졌는지는 역사가 말해준다. 일본의 인식 전환을 촉구하는 바이다.             

마리아의 집

에페수스에는 기독교 관련 유적도 많은데 그 중 흥미로운 유적이 하나 있다. 예수 사후 제자 요한이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고 전해지는 '마리아의 집'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기 전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였고 요한은 마리아를 이곳으로 모시고 와 여생을 같이 했다고 전해진다.   

한국 방문객이 많아 한국어 안내판도 세웠다

마리아는 이곳에서 여생을 마감했고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작성했다고 전해진다. 마리아가 정말로 여기서 남은 여생을 다 했는가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은 이곳을 성지로 선포하였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마리아의 숨결을 느끼고자 이곳을 방문한다. 1967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가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에페수스는 한번의 방문으로 다 돌아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3천 년 전에 소프트 파워를 구현한 에페수스, 다음의 방문을 기약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