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16
돈황은 관문입니다. 중국의 문물이 돈황을 거쳐 서역으로 나가고 서역의 문화가 돈황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옵니다. 돈황이라는 말 자체가 크게 번성하다는 뜻이지요. 워낙 옛부터 깐수성, 칭하이성,시장성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로 다양한 문명이 뒤섞여 발전하여 '동서문명의 보물고'니 '사막의 대회랑' 이라는 호칭을 가지기도 합니다.
기원전 2세기 월지국을 가기 위해 군사를 이끌던 장건은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메게 됩니다. 이때 병사 중 하나가 물을 발견하고 군대는 물가에 주둔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여기를 크게 흥한다는 의미의 돈황으로 부르게 되었다는군요. 이후 河西 4군의 하나인 돈황군을 설치하게 됩니다. 5호 16국 시대에는 전량(前凉)의 영토가 되었고 곧 전량의 도읍이 됩니다. 5세기 북위를 거쳐 당나라 초기에 전성기를 누리지만 이후 토번(티벳)에게 점령되고, 다시 11세기에 서하(西夏)가 190년간 통치하게 됩니다. 서하를 멸망시킨 원대에는 沙州로, 명대에는 사주위로, 청대에는 다시 돈황현으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18만명에 달하는 주민 대부분은 한족이고 회족과 위그루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은 1%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사막이면서도 곤륜산맥이 물이 당하를 통해 시내를 관통하여 면화와 과일 농사를 가능하게 합니다.실제로 돈황은 깐수성 최대의 면화,과일 산지라고 합니다.
일행들과 침대칸 술자리가 마무리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가 돈황역(옛 유원역)에 도착합니다. 잠도 부족하고 마신 술도 덜 깬 상태에서 짐을 챙겨 차에 오릅니다. 돈황역에서 돈황시로 들어오는 길은 악전고투입니다. 예전에 포장되었던 길이 관리가 안돼 일명 '낙타길'이라고 불린답니다. 낙타나 다닐 수 있는 길이라는 뜻이지요. 이런 낙타 길을 버스가 그냥 내달립니다. 험한 길을 어찌나 내달리는지 이 차는 아마도 전생에 낙타였던 것 같습니다.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후 명사산으로 출발합니다. 한잠을 더 자나 했더니 바로 숙소옆입니다.
명사산은 불어대는 강퐁에 무너지는 모래소리가 산울림처럼 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전에 대학 다닐 때 친구넘들과 같이 갔던 남해바다의 명사십리가 생각이 나 이름이 낮설지 않군요. 사실 이름만 친근할뿐,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해본 곳이 명사십리입니다. 한 친구의 제안으로 명사십리를 가기로 결정, 10여명이 텐트 두동을 짊어지고 출발합니다. 무슨 치기인지 장구까지 메고 말이지요. 이대입구집합 - 지하철 타구 강남터미널 - 버스 타고 해남 - 버스 타고 완도항 - 배 타고 신지도 - 버스 타고 명사십리 해서 도착했습니다. 10시간 걸려 도착한 명사십리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어마어마한 바가지 요금이었습니다. 민박도 못하고 해변에 텐트 두동을 치고 일행 10여명이 3박4일 을 버팁니다. 저는 한번도 텐트 안에서 자본 적이 없고, 그저 명사를^^자장가 삼아 노숙을 하게 됩니다. 밥 한끼 해 먹으려면 해변에 몇개 안 되는 수도가에 붙어 아웅 다웅합니다. 그나마 먹는 것까지는 어떻게 되는데, 설걷이라도 할려면 수돗가는 아예 전쟁터로 돌변합니다. 지금도 이때 얘기를 하면 친구 녀석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듭니다. 놀아준다고 데려간 친구 동생녀석이 앞으로 절대로 형들과 같이 안 다닌다고 선언한 곳도 여기구요. 20년전의 일이 갑자기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 것을 보니 역시 고생한 기억이 오래도록 간직되는 것 같습니다.
모래가 소리가 나는 원인은 무엇인까요. 몇가지로 설이 있습니다.
첫째로 모래가 이동하면서 공간이 생기고 이 공간에서모래가 움직여 진동이 발생한다는 설입니다.
둘째는 사막하부의 습한 모래의 진동파가 위의 건조한 모래층에 전달되면서 소리가 난다는 설
셋째는 모래가 건조해 모래표면에 있는 석영 성분이 바람이 불거나 사람이 밟을 때 마찰로 소리가 난다는 설
네째로 모래표면의 석영결정체가 압력을 받을 때마다 전기가 발생하고 진동작용을 일으켜 소리가 난나는 설 등 입니다.
어떤 것이 사실인가는 실험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여러가지 설만 있는 것이 여기 실크로드와 사막에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비롭기도 하고 좀더 있어 보이기도 하구요^^
나무계단을 밟고 모래 언덕을 올라봅니다. 물론 나무계단은 모래언덕 등산용으로 설치된 것이 아닙니다. 언덕 중간에 설치해 놓은 모래썰매를 위한 것이지요. 썰매는 당연히 유료지요. 중국인이 어떤 넘들입니까^^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언덕인데 만만치가 않습니다. 중간이후로 계단이 없어지고 더욱 더 올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냥 내려가자니 보는 눈이 많습니다^^ 낑낑대며 20여분 걸려 올라오니 월아천이 보입니다.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은 2천년전부터 사막의 나그네에게 물을 대어주던 생명의 오아시스입니다. 길이가 동서 224m 남북으로 최대 39m 깊이는 5m 됩다고 합니다. 월아천은 곤륜산맥의 물이 당하강을 거쳐 지하로 흐르다가 지대가 낮은 이곳으로 솟아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돈황이 황량한 사막으로 변하자 선녀가 슬퍼서 눈물을 흘렸고 이 눈물이 샘을 이루었다고 전해집니다. 선녀의 눈물이든 아니든, 월아천은 황량한 모래사막 한가운데 솟아나 연못을 이루며 신비감을 더 합니다. 월아천이 도교의 성지로 불리며 도관이 만들어진 것도 어쩌면 너무 당연해 보입니다. '산은 호수로 인해 더 아름답고, 호수는 산으로 인해 보다 유명하며 아름답다'는 말이 너무도 어울리는 곳이 월아천입니다.
파란 하늘과 조화를 이룬 이국적인 풍광에 넉을 잃습니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여기가 중국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운남성 차마고도를 따라 트레킹하다 보면 히말라야인지 알프스인지 분간이 안 갑니다. 구채구를 걷다보면 터키에 와 있는 착각이 들기도 하구요. 황산을 가다보면 금강산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넓은 땅 떵어리에 다양한 경치와 지형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부러운 넘들...
막고굴에 도착합니다. 막고산이라 불리는 명사산 동쪽끝 절벽에 막고굴이 있습니다. 천불동이라고도 불리는데, 중국에 있는 여러 천불동 중에서도 단연 첫손가락을 꼽아주는 곳이 바로 돈황 막고굴입니다.
막고굴은 4세기 중협 전진시대에 낙준(樂俊)이라는 승려가 만들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명사산과 막고굴의 맞은 편의 삼위 산에 천만불이 춤을 추는 모습이 보여 그곳에 불상을 모셔놓고 굴을 파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합니다. 이후 원대까지 무려 1천년간 각 왕조에 걸쳐 계속해서 건설합니다. 지금까지 남은 석굴은 550개가 남아 있으며 474개의 굴에 불상과 벽화가 남아 있습니다. 막고굴은 동서문명교류의 중심이었던 돈황에 서역문명과 조화된 불교예술이 가장 화려하게 꽃을 핀 세계적인 불교유적입니다. 총면적이 무려 45000km에 이르며 1961년 중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에 지정되고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됩니다.
막고굴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완전한 형태의 소상과 벽화가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 소상과 벽화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돈황학'이라는 학문까지 탄생시킨 이른바 '돈황문서'입니다. 한문부터 산스크리트어,위그루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문서가 모두 3만점에 이릅니다. 17번 석불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문서에는 프랑스인이 탈취해간 신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있었습니다. 이 문서들의 상당부분은 영국의 스타인을 비롯해 프랑스의 펠리오, 일본의 오오나티 미국의 워너, 러시아의 올덴부르그 같은 자들에 의해 약탈되어 그들의 모국으로 보내집니다. 이들은 또 많은 석굴을 파괴하며 벽화를 뜯어내어 상자에 담아가는 만행도 저지릅니다. 그래서 막고굴은 문명의 약탈 파괴 현장이기도 합니다. 벽화를 열심히 해설해 주던 막고굴의 고급해설원인 이신선생이 이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표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겠지요
벽화보존 관계로 내부 사진 촬영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신선생의 배려로 다양한 석불을 둘러보고 설명을 듣으며 1000년도 넘의 벽화의 세밀함과 화려함에 다시 한번 놀랍니다. 막고굴의 벽화는 한줄로 배열하면 높이가 1m에 길이가 45km 정도의 화랑겔러리를 구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45km면 서울에서 문산까지의 거리입니다.
막고굴을 대표하는 누각으로 가장 큰 미륵불좌상이 있는 96호굴입니다. 이 불상은 측천무후원년인 695년 영은선사와 음거사가 만든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당시 황제가 여성인 탓에 불상도 여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라.... 중국유일의 여황제. 남편과 아들까지 죽이고 황제에 오른 잔혹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7세기 중국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여자가 황제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결국 권력유지를 위해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공포정치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통치기는 태종이 통치하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아 ‘무주(武周)의 치(治)’라고 불리며, 이후 당(唐)의 전성기인 현종(玄宗, 재위 712∼756) 때의 ‘개원(開元)의 치(治)’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300년전의 측전무후를 보며 아직도 자연의 시련과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실크로드 여인들의 안타까움이 떠오르는 것은 저만의 지나친 상상일까요?
막고굴을 끝으로 이번 실크로드 여행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급작스럽게 출발하여 많이 준비도 못하고, 짧은 시간에 그 먼거리를 이동하느라 차를 타고 있는 시간이 무척 길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문물을 접하면서 새삼 척박한 환경을 살아가는 실크로드 사람들의 강인함에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산맥도 가로막지 못하고 사막도 가로막지 못하는 힘으로도 가로막지 못했던 그들의 문명과 의지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할런지... 언젠가는 이 중국 너머에 있는 실크로드의 흔적과 사람들의 삶을 다시 한번 이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깜장소의 가족 나드리 1편 - 광저우 (2) | 2024.01.03 |
---|---|
원자력발전소 기행문 (2) | 2024.01.03 |
포도와 카레즈 그리고 화염산, 투르판 - 깜장소의 비단길 나드리 7편 (1) | 2024.01.03 |
고선지,혜초 한락연을 찾아, 쿠처 - 깜장소의 비단길 나드리 6 편 (1) | 2024.01.03 |
비단과 문익점, 옥의 도시 호탄 - 깜장소의 비단길 나드리 5 편 (1) | 2024.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