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8.18
2015. 8.10일부터 일주일간 북중 국경지대를 다녀왔다. 두만강 하류인 북한 남양시를 마주한 토문에서 압록강하구인 단동을 거쳐 대련에 이르는 여정이다. 통일부 주체 통일연수의 프로그램인데 참여자는 초중고 교사. 통일부, 국회공무원 대학생 등이다. 현재의 남북관계를 반증하듯이 북한 땅에는 발도 못 들이고 중국 땅에서 국경을 따라오는 일정이다. 2007년 금강산 2008년 개성을 다녀온 나로서는 무척 아쉬운 여행일 수밖에 없다.
2015.8.10일 아침일찍 인천공항으로 향한다. 휴가철인 지라 많이 북적인다. 그래도 오랫만에 타는 국적인기인관계로 출국심사장 바로 앞에서 비행기를 탑승한다. 얼마 만에 타는 국적기인지ㅎㅎ 그동안 저렴한 항공기를 찾다보니 국적기 탈일이 별로 없었다. 가난한 여행자의 숙명인가...
길림에서 대련에 이르는 긴 거리의 이동이다. 물론 차타고 4시간 정도까지는 이웃집 마실가는 거리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얼마 안 되는 거리일 수 있다. 12 시간 씩, 가끔은 침대차로 2,30시간 씩 이동했던 이전 중국여행에 비해서도 짧은 거리 이동이다. 그래도 기껏 차로 3, 4시간이면 모든 곳에 도착하는 우리나라 여행에 비해서는 참 지겹다. 대부분의 중국여행은 이동 시간과의 씨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조급하면 힘들어진다. 중국인들 만만디 정신도 이런 상황에서 나왔을 것이다.
몇 시간 만에 연길공항에 도착한다. 연길은 조선족자치주 주도로서 시골공항을 연상시킨다. 그나마 간판에 한글과 중국어 동시에 표시해야하는 관계로 한글이 많이 보인다. 바로 버스를 타고 용정의 대성중학교로 향한다. 대성중학교는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의 산실로 윤동주의 모교이다. 대성중학교는 명동중학교 은진중학교 등 몇 개의 학교가 통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윤동주가 공부한 교실도 보인다. 윤동주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자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방학을 맞아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인 연길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 두산백과 -
1943년 사상범으로 체포된 윤동주는 1944년 2월 감옥에서 죽음을 맞는다. 28살의 지병도 없던 건강한 젊은이가 갑자기 죽게 되었으니 여러가지 의혹들이 제기 되었다. 실제로 광범위한 생체실험을 진행했던 일본 제국주의니 생체실험에 의한 죽음이라는 의혹이 일어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윤동주 생가를 들려본다, 윤동주 생가는 용정 근처 명동촌에 자리한다. 작은 집 하나 있을 공간을 확장하여 많은 시비와 기념물들로 장식해 놓았다. 윤동주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명이다. 윤동주의 서시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 두번째이고 별헤는 밤 은 네번째 좋아하는 시다. 이 시들이 실려 있는 시집은 그의 살아 생전에 발간되지 못했다. 그의 작품들은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된다(1948).
마침 올해가 윤동주 서거 70주년이다. 술 한잔을 올리며 윤동주의 넋을 추모해 본다.
간도는 무척 추운 지방이다. 추운지방 답게 함경도식의 1자 집을 지었다. 워낙 추운 관계로 불을 때는 아궁이도 실내에 있다. 우리 민족이 연해주 간도로 진출한 것을 19세기 일이다. 함경도, 평안도에 심각한 기근이 들자 많은 수의 농민들이 고향을 버리고 이주를 택한다. 이주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 학자도 있다. 19C 한국을 여행은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당시 광범위하게 만연된 관리들의 수탈이 북방의 한국인들 이주를 촉진하였다고 평가한다. 당시 절망적인 한반도 백성들의 삶과는 달리 가렴주구를 피해 도망치듯이 이주한 한국인들은 아무 것도 없던 황무지를 개척하여 보란 듯이 한국식의 벼농사를 일구어 낸다. 이 장면을 목격한 비숍은 비로소 간도에 와서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보았다고 설명한다.
중국의 국경도시 투먼으로 향한다. 투먼은 북한의 국경도시 남양과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남양은 한반도에서 위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즉 한반도의 북쪽 끝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리 가운데 빨간색으로 북한과 중국을 가르는 국경선이 보인다. 살짝 넘어가 월북^^을 시도해 본다. 중국 경비병이 호각을 불며 소란을 떤다. '그래 안 간다 임마' 분명 우리민족이 사는 우리 땅임에도 외국 경비병에 제지당하는 현실이 서글퍼진다. 그래도 이전에는 금강산도 가고 개성도 갔었는데... 언제 다시 북한 땅을 밟을 날이 다시 오려나 생각하니자꾸 마음이 아파온다.
그렇게 여행 첫날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송정에 올라 본다. 가곡 선구자로 우리에게 친숙해진 일송정. 최근에 심어진 것으로 보이는 푸른 소나무 한그루와 자그마한 정자가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일송정은 용정시에서 서쪽으로 약 3㎞ 떨어진 비암산에 있다. 원래 산 정상에 우뚝 선 한 그루 소나무로서 그 모양이 정자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명칭이며, 룽징8경[龍井八景]의 하나로 꼽혔다. 일제강점기에 롱징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곳이었으며, 산 정상에 독야청청한 모습으로 우뚝 선 일송정은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상징이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실제로 일송정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집회 장소로 많이 애용되었다고 한다. 조망이 좋아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다 보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야 하는 독립운동가들의 당연한 선택이라 하겠다. 그리고 일제는 1938년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이 소나무에 위해를 가해 고사시켰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소나무는 1991년에 다시 심은 것이다.
일송정에서 용정시를 바라본다. 용정을 가로지르는 해란강을 사이에 두고 지평선에 닿을 듯이 논이 펼쳐 있다. 이 자리에 서면 한국인 누구나 선구자를 읍조리게 된다 .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저녁 호텔에서 통일을 주제로한 워크숍이 열린다. 강사의 주제 발표와 조별 토론이 이어진다. 강사로 나온 통일연수원 교수는 박근혜 정부의 드레스덴 선언의 의미를 부각시키려 노력한다. 드레스덴 선언은 크게 세가지를 제안한다. 1. 인도적 문제의 해결. 2. 공동 번영을 위한 공동 인프라 구축. 3. 남북주민 간 동질성 회복 등이다. 그런데 이 선언은 전제가 붙어 있다. 북한의 핵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핵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냥 포기? 북한이 아무런 대가 없이 핵을 포기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결국 이 선언은 결과 도출을 위한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비핵개방 3000 정책과 같은 맥락이다. 북한이 흡수통일 방안이라며 격렬하게 반발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그러면 남북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 실마리는 개성공단에 있지 않을까 싶다. 남북 간의 사고 의식격차는 경제적 격차보다도 휠씬 더 크다. 단기간에 극복은 불가능해 보인다. 경제, 사회, 스포츠 정치 분야 등 다양한 교류를 통해 남북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좁혀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 없이 통일은 불가능하다. 아니 그런 통일은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기에 안 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남북 주민 간 생각과 의식의 차이 문제에 대해 알고 싶은 신 분은 2015년 여름에 출간된 '개성공단 사람들' 이란 책을 보시기 바란다. 결국 북한 문제를 풀어가는 핵심은 교류를 통한 영향력 확대가 아닐까 한다. 지금 처럼 남북간의 모두 교류와 대화 창이 단절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2016년 벽두에 진행된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서도 우리로서는 사실상 북한을 제제한 아무런 수단이 없다. 북한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대북 방송이 북한이 엄청 두려워하는 체제 붕괴의 수단이라도 되는 냥 떠들었지만 북한은 가볍게 무시하고 있다. 만약 2015년 10월에 진행된 남북 고위당국자 회담에서 금강산관광을 재개하기로 합의 하였다면 북한이 이렇게 쉽게 핵 실험을 진행할 수 있었을까? 혹자는 개성공단이라도 폐쇄해서 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개성공단의 폐쇠는 우리에게 주는 피해가 휠씬 더 크다. 우리가 얻고 있는 이익도 북한보다 휠씬 크다.
토론이 끝나고 조별 결과 발표를 진행한다. 조장이었던 내가 한마디 해 본다. '통일은 과정입니다. 과정없이 결과만 바라보는 것은 공부는 하나도 안 하고 성적이 잘 나오기 바라는 학생과 같습니다'
다음날 중국의 삼합 망강각(望江閣) 이라는 곳으로 행한다. 여기는 북한 회령을 바라보는 전망대이다. 두만강 폭은 불과 2,30미터 정도 걸어서도 건널 수 있을 정도다. 멀리 강가에 물고기 잡는 것으로 보이는 북한 아이들도 보인다.
그리고 백두산으로 향한다. 백두산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첫 번째 왔을 때의 설레임은 다소 가라 앉고 여유 있게 이것 저것 살펴본다. 백두산을 오르는 길은 대략 세개가 있다. 서남북에 하나 씩 있는데, 가장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 오늘 가게 되는 서파이다. 서파 쪽은 코스가 짧고 완만하다. 반면 북파 코스는 좀 더 길고 가파르다. 그리고 몇년전 새로 만들어진 남파 코스가 있다. 이쪽은 북한 땅을 통해 백두산을 오르는 것인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백두산 천지는 55%가 북한 나머지가 중국에 속한다. 8,90년대 북한이 백두산을 중국에 팔아먹었다고 호들갑 떨던 일부 언론의 주장과는 상당히 다른데 그 과정은 압록강 두만강 국경문제와 더불어 조금 있다가 다루어 보겠다. 북한은 1990년대 이후 천지에 산천어를 비롯한 물고기를 풀어 놓고 관리하게 시작했다. 그런데 민물고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이를 마구 포획해 가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북한은 2007년 중국과 백두산 관리에 대한 협상을 벌인다. 협상 결과 천지의 물은 북한에서 관리하고 대신 북한쪽 봉우리 3개를 중국이 관리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이 코스로 만들어진 등산로가 남파코스이다. 혹자는 북한이 3개 봉우리를 중국에 주었다고 하지만 북한 중국과의 협약 특성상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천지에서 내려오는 길, 장백산 대협곡에 들려본다. 그런데 이 계곡은 3년전까지만 해도 주정대협곡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아마 장백산을 대표하는 계곡이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화산재로 만들어진 곳에 물이 흐르면서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다음날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으로 향한다. 국내성은 현재 중국 집안시 안에 있는데 나름 깔금하게 정리되어 있다. 물론 집안시 안에 있는 고구려 국내성은 중국의 동북 공정의 시작과 더불어 정리된 유적들이 많다. 정리 후 자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까지 해 버린다.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사실 자국의 조선족과 소수민족의 내부단속용이라는 견해가 많다. 즉 우리 중국은 예전부터 같은 민족이었다 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자니 '중화민족' 이라는 없던 개념도 만들어 내고, 징기스칸이 중화민족의 영웅이라는 황당한 주장까지 하게 된다. 중국이야 어떨 지 몰라도 멀쩡한 남의 나라 역사를 자기 것이라고 우기고 나서니 우리는 황당할 따름이다. 국내성 대표적 유적은 장군총과 광대토대왕비이다.
장군총은 19세기말 광개토대왕비가 해독되기 전까지 누구의 무덤인지 전혀 알지를 못했다. 북 중 국경에 있기 때문에 국경을 지키는 장군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측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장군총이라 불리게 된다. 지금도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추정만 할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나마 19세기말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이 해독되면서 집안이 고구려 국내성 유적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광개토 대왕비는 19세기 일본에 의해 발견된 이후 수 많은 논쟁과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비석이다. 특히 유실되어 보이지 않는 글자를 포함한 해석 상의 문제로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비석만 보고 싶으시면 구태여 집안까지 가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실물과 같은 크기로 똑같이 재현해 놓고 있다.
단동에 도착 유람선을 타 본다. 강옆으로 어족도라는 북한의 섬이 보인다. 위화도 위쪽에 위치하는 섬인데 면적은 여의도 보다 크다고 한다. 압록강 수계의 섬들은 1962년 국경을 확정한다. 압록강 전체 205개중 127개가 북한, 78개가 중국 쪽에 귀속된다. 특이할 만한 점은 하류에 있는 대부분의 큰 섬은 다 북한의 영토이고 면적으로 보면 94.8% 가 북한의 영토가 된다. 앞서 설명하대로 천지는 전체면적 중 55%가 북한에 속하고 45%가 중국에 속한다. 이것은 1962년 김일성과 주은래사이의 조중국경변계조약에서 확정되었다. 위에 설명한 압록강의 섬들도 이 조약에 의해 국경이 확정되었다. 두만강의 포함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천지의 면적은 북한에 55%가 속하게 되었고, 압록강 두만강 수계의 섬 451개 중 북한이 264개 중국이 187개를 나누어 가진다. 그런데 면적으로 보면 압록강 두만강의 섬 전체 면적의 86% 가 북한으로 14%가 중국에 속하게 된다. 즉 대부분의 큰 섬들은 북한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이다.
수 많은 나라와 분쟁을 겪고 전쟁도 불사하며 영토문제에 관해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중국이 어떻게 북한과는 이런 영토 조약을 체결했나 이상할 지경이다. 8.90년대 북한이 6.25 참전의 댓가로 백두산 영토의 상당부분을 양보했다고 멋대로 떠들던 우리나라 일부 언론도 있었다. 사실 이 조약에 대한 내용도 2000년 카톨릭대 안병욱 교수가 연변의 고서점에서 조중국경변계조약이 실려있는 문건을 찾아 낸 이후에 알려진 것이다.
그러면 왜 중국은 북한과 이런 영토조약을 맺었을까?
몇가지 원인이 있어 보인다.
첫 째는 중소국경 분쟁에 이은 사회주의 패권다툼의 영향으로 보인다. 50년대 말 우수리강 유역의 영토문제로 전쟁까지 치른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60년대 내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북한은 이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 외교를 한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등거리를 외교를 하면서 중국과 소련으로 부터 막대한 원조를 얻어낸다. 특히 마오쩌둥은 정치 외교 안보적인 이해관계 상 북한을 중국 편으로 남겨놓기 위해 많은 물자를 지원한다. 이른바 3대 전략물자라 해서 경제적인 계산은 하지 않고 매년 석유 150만톤, 식량 100만톤, 코크스탄500만톤 정도의 지원을 하게 된다. 이 줄타기 외교 속에서 열린 국경 협상이었고 중국은 소련을 의식해 상당부분 양보한 속에서 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는 북한의 협상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주은래를 북한으로 불러들여 협상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간도협약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 땅을 일본이 중국에 넘겨주었으니 그 조약부터 무효라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중국이 일본과의 간도협약을 무효라는 북한의 주장을 인정해 줄 리는 없으나 협상의 과정에서 일정정도 양보를 얻어내는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1960대 북한은 경제 발전 성과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4.19가 일어난 1960년에 우리의 국민소득은 87달러였다. 반면 북한 148달러로 우리보다 1.6배이상 잘 살고 있었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일정 정도의 성공과 소련,중국 및 둥구권의 일명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도움이 많이 있었다. 이런 자신감으로 조중국경변계조약을 맺어 국경을 확정하자고 먼저 제의한 것도 북한이었다
이런 몇 가지 원인으로 조중국경변계조약은 북한에게 유리하게 체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영토에 관해 불리한 조약을 체결한 한 이유로 중국은 이 조약의 존재 자체를 비밀에 붙인다. 중국에서 이 조약에 대한 문건이 발견된 것도 1999년이 되어서이다.
북한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천지를 비롯한 북한 중국의 국경문제는 있는 사실 그대로 보아야 될 것으로 여겨진다.
단동 건너 건너편 신의주가 보인다. 사실 단동은 안동(安東)이라 불리던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20세기 초 신의주와 마주 보고 있는 국경이라는 이유로 일제에 개항이 되었고, 1965년에 단동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 보잘 것 없던 마을은 이제는 인구 100만의 대도시로 성장하여 밤이면 불야성을 이룬다. 중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14개 나라의 국경도시 중에 가장 커다란 도시가 되었다. 반면 건너편의 북한 땅 신의주는 거의 발전하지 못하고 밤이면 꺼질듯한 희미한 불빛 만을 내 비치고 있다. 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얼마나 어려울까...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이 편치 만은 않다.
중조우의교(中朝友谊橋)가 보인다. 다리가 두 개인데 앞 쪽 다리는 6.25 때 폭격에 맞아 끊어진 채로 있다. 그렇게 단동을 거쳐 대련에 다다른다.
대련 여순일본관동법원을 간다. 이곳은 일본인 만주 침략의 발판을 삼고 항일 조선인과 중국인을 재판하기 위해 만든 법원이다. 이곳에서 재판을 받은 가장 중요한 인물은 누가 뭐래도 안중근 의사이다.
안중근의사는 잘 알려진대로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여순으로 호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체포되어 호송되기 전 안의사는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과 재판 과정에서 한국의병 참모중장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이토가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 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며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거사 동기를 밝혔다.
일본 검찰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은 안중근 의사는 여순감옥에 수감된다. 여순감옥은 여순관동법원과 더불어 일본이 항일 조선인 중국인을 가두기 위해 만든 시설로 1945년 일본 패망 때까지 20만 가까운 사람들이 수감된다. 이 중 안중근의사가 있다. 여순감옥을 살펴보니 안중근 의사의 독방, 일반 사형장, 독립되어 있는 안중근의사의 사형장 등이 잘 보전되어 있다. 처음에는 중국인이 한국 관광객을 겨냥해서 만든 시설인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여순감옥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국사람들이고 20만명의 수감자 중 일본의 국사범 취급을 받은 것은 안중근 의사가 유일하다. 즉 여순감옥에 수감된 20만명의 사람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누가 뭐래도 안중근 의사인 것이다.
따로 만들어 놓은 사형장에서 안의사를 사형시킨 일제는 안의사의 유해와 무덤이 항일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 한다. 이에 안의사의 유해를 빼돌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 버린다. 지금도 안의사의 유해를 찾으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여순감옥은 안중근 의사 이외에도 신채호 선생과 이회영 선생같은 독립운동가들도 수감되었던 곳이다. 중국 정부는 이분들을 이곳에 수감되었던 중국의 항일 운동가들과 함께 나란히 기념하고 있다.
이러게 일주일간의 통일연수를 마치게 된다. 북한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며 진행된 통일 연수, 다음에는 북한땅을 밟고 진행되는 통일 연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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