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07
지난 1월 21일부터 30일까지 가족들과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상하이, 항저우, 난징 등을 돌아다녔습니다. 아무래도 위도가 남쪽이라 한국보다 따듯하지 않을까 했습니다만 중국도 한국못지 않게 이상한파가 계속되더군요. 20년만에 한파라나요. 겨울은 날씨가 추워 그리 여행하기 좋은 계절은 아닙니다. 그래도 한가지 장점은 있습니다.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럼 상하이부터 가볼까요.

동생네 식구가 먼저 출발입니다. 동생네 매제와 큰 넘은 일이 있어서 못 가고 작은 넘만 데리고 여행에 나섰습니다. 나중에 예매한 관계로 시간이 다릅니다. 그런데 출발 이틀전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습니다. 비행기표와 단체 비자를 확인해 보니 항공사가 달라 상하이 푸동 입국터미널이 다른 것었습니다. 즉 같이 중국 입국을 못한다는 것이지요. 갑자기 난리가 났습니다. 여기 저기 수소문하고 뛰어다니고 돈 들이고^^ 간신이 출국일 아침에 두명만 개인비자를 받아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하여간 미리미리 확인해야 하는데.... 작년에 여객터미널에서 여권을 안 가지고 와서 혼자 가족여행을 못간 친구 넘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바보라고 한참 욕했는데^^ 미안하다 음악티야!

이제 나머지 일행도 출발입니다. 이번 여행은 동생네 두명 오른쪽의 마눌과 딸둘의 깜장소 식구 4명, 동생네 2명, 형식구 3명에 맨 왼쪽의 조카 친구녀석해서 총 10명입니다.

여행자 보험도 들고 일정도 확인합니다. 여행자 보험은 가입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패키지 여행의 경우 당연히 가입이 됩니다만 저희처럼 개인적으로 가는 사람들은 따로 가입해야 합니다. 1인당 열흘이면 2,3만원이면 됩니다. 제 경우 오스트리아에서 아이가 다쳐 병원에 간 치료비도 받았도, 피렌체에서 도난당한 무전기도 보상을 받았습니다. 하여간 만사 불여튼튼 유비무환입니다^^

상하이 푸동공항에 내려 자기부상열차를 타고 지하철로 환승합니다. 이번 상하이 일정은 대부분 지하철로 이동합니다. 호텔 바로 옆이 지하철역이었습니다. 상하이 지하철은 손잡이가 무척 많습니다. 승객들 안전에는 유리한 면이 있겠습니다만 휠체어나 장애인이 타면 좀 불편할 것 같습니다. 상하이가 많이 발전했다고 해도 아직은 중국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그 나라의 수준을 알아보는 가정좋은 방법 중 하나가 장애인에 대한 처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뭐 말은 이렇게 합니다만 우리도 이대입구 지하철역에 장애인 엘리베이터가 생긴 지 몇년 안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호텔에 짐을 풀고 호텔 뒷편에 있는 조그마한 야식 거리로 나갑니다. 중국와서 첫날밤에 첫번째 음식이라 다들 기대가 큼니다만 그냥 시장표 좌판음식 되겠습니다. 중국음식 특유의 향신료 냄새에 맛, 좀 힘들어할까 싶은데도 다들 잘 먹습니다. 제가 겁을 너무 많이 준 모양이네요. 사실 여행가는 즐거움 중에 하나가 먹는 것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중국이나 다른 남방 나라를 가면 특유의 향기때문에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방법은 그냥 참고 먹어보는 것이지요ㅎㅎ 자꾸 먹다보면 익숙해지고 어느새 좋아하기까지^^ 합니다. 다들 그런대로 잘 먹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지네요.

꼬치 몇십개에 국수 두그릇 먹었는데 440위안을 달라고 합니다. 440위안이면 한화로 8만원입니다. 아니 이것들이 바가지를 씌우려고 아주 작정을 했습니다. 한 100위안 정도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외국인이고, 말도 안 통하고, 하나하나 가격확인도 안 하고, 이 참에 잘 되었다 싶은 모양입니다. 생존중국어 몇마디 밖에 못하는 제가 주인과 난리를 칩니다. 무조건 맞다고 우기는 주인넘을 잡고 꼬치를 가격을 물어가며 하나하나 셉니다. 그러자 갑자기 맥주값이 비싼거라고 우기기 시작합니다. 선토리 맥주 한병에 60위안이라나요. 그러니까 우리돈 만원이라는 얘기입니다. 특급호텔에서도 3,40위안 받는 백주가 60위안이라니 말이 안 된다 항의 했더니, 자기는 그렇게 받는다 합니다. 아니 이것들이 사람을 뭘로 보고....... 제가 주인 손목을 잡습니다. 가자 공안한테! 그리고 끌고 갑니다. 어디에 공안이 있나는 모르겠습니다만 방법이 없습니다. 한 10m 를 끌려오던 주인녀석 갑자기 얘기가 바뀝니다. 백주 한병에 60위안이 아니라 6병에 60위안이라고. 결국 그 난리를 치고 백몇십 위안 주고 가계를 나옵니다. 그래도 공안은 여전히 무서운 모양입니다. 식구들 모두 열 받아 한마디씩 합니다 하여간 중국넘들 방심하면 여지 없습니다.

다음날 난징루(南京路) 거리로 나옵니다. 지금 난징루 거리는 차량이 다니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보행자 전용거리입니다. 모든 도로에 자전거 전용차선이 있고, 우리는 하나도 없는 보행자 전용거리도 있고, 도로 설계나 운영면에서는 중국이 우리나라보다 앞서 있다는 느낌입니다.
사실 난징루라는 이름에는 중국의 아픈과거가 묻어 있습니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에 패하고 난징조약을 맺어 상하이를 영국에 조차하게 됩니다. 상하이는 영국의 전리품인 것이지요. 그리고 영국은 상하이 최대 번화가에다가 난징조약으로 상하이를 얻었다는 뜻으로 난징루라고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인민광장 뒤 인민공원안에 무언가 벽보 비슷한 것들이 잔뜩 붙어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구인시장입니다. 우리나라 구인시장 하면 흔히 건설일용 노동자 시장을 말하는데 여기는 그게 아닙니다.

대졸자도 있고 있고 석사도 있고 하여간 우리나라에는 이미 인터넷으로 보편화된 짝짓기시장^^이 아직도 공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직도 중국은 온라인보다는 오프라인을 좋아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터미널에서도 볼 수 있지만 춘절이라고 고향에 돌아가면서 40인치가 넘는 TV를 버스에 싣고 직접 가져갑니다. 배달이나 택배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인민공원에서 한장 찍어봅니다. 뒤에 상하이 도시계획관 건물이 보는 군요. 이전에 왔을 때 가 본 기억이 잘못 되었나 박불관으로 착각하고 들어갑니다. 박물관은 더 앞에 있는 건물인데 말이지요.
제가 등산 배낭을 매고 있군요. 여행 다닐 때 팁 중에 하나가 작은 배낭을 매고 다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작은 섹이나 허리 가방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기도 합니다만 적절한 크기의 배낭이 좋습니다. 우선 등 뒤로 배낭이 있어도 여권같은 중요한 것들은 가장 아래 두면 도난의 위험은 거의 없습니다. 또 배낭 자체가 워막 주머니가 많아 쉽게 찾아내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쇼핑이라도 할라치면 물건을 담고 수납하는데 배낭만한 물건이 없습니다. 특히 등산배낭은 등판이나 어깨끈이 잘 설계되어 있어 왠만한 무개이도 무리를 주지 않습니다.

도시 계획과 내부 정경이군요. 상하이는 역사도시가 아닙니다. 1840년 이후부터 개발된 도시입니다. 따라서 역사유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조차된지 불과 몇십년만에 국제 도시로서 자리매깁하기 시작합니다. 19세기말 20세기 초가 되면서 급격하게 성장하고 동방의 뉴욕이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인구 300만의 국제도시로 팽창됩니다.

마오쩌뚱의 공산혁명이후 농촌의 도시지배라는 독특한 체제속에 정체되었던 상하이는 개혁개방, 그리고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계기로 다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광저우와 더불어 중국경제를 이끄는 핵심원동력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상하이 출신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중국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불어보면 꼭 상하이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상하이가 중국을 먹여 살린다는 자부심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요중 중국에 가보면 독특한 디자인의 빌딩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디자인이 외국인에 의해 만들어진다고는 합니다만 천편일적인 사각형 빌당만 보아 온 저에게는 흥미롭습니다

옥상에 UFO가 착륙했군요^^

그리고 저녁무렵 도착한 곳, 예원입니다. 예원은 역사도시가 아닌 상해에서 중국전통의 건축과 정원을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입니다. 예원은 명나라 때인 1559년 반윤단이라는 인물이 아버지를 위해 공사를 시작, 20여년에 걸쳐 완공된 것으로 중국 정원 중에서도 가장 섬세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 곳입니다.

중국정원의 한가지 특징은 괴석(怪石)이 많다는 것입니다. 북경의 이화원부터 소주 졸정원이나 여기 예원까지 모두 괴석 박물관이라해 도 과언이 아닙니다. 괴석의 생김새와 크기가 바로 정원의 품격과 만든이의 정성을 나타낸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심지어 이화원의 한 괴석에는 그 돌의 소유자가 어떻게 바뀌었으며 그돌로 정원 치장하느라 집안이 몰락한 전설까지 따라다닙니다.하여간 중국인들의 대단한 돌 사랑입니다ㅎㅎ

예원은 상가의 야경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야경을 보자면 좀 늦게 입장해 마감시간에 맞춰 나오시는 것이 좋습니다. 겨울이라 5시 마감입니다만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군요.

실제 배경은 이것보다 좀 더 아름답습니다만 사진 실력이 별 볼이 없습니다.

막내 민지가 저녁식사 자리에서 골아 떨졌습니다. 동생네 둘째녀석인데 프랑스에서 태어나 현재 프랑스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하긴 하루 종일 걸었으니 일골살 짜리가 견디기에는 좀 무리입니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 10분정도 걸으니 와이탄입니다. 상하이에서 야경이 가장 아름답다는 곳입니다.

와이탄은 1910년대부터 미국자본을 중심으로 뉴욕의 맨하탄을 모방한 은행건물들이 와이탄의 초창기 무역업체(商館) 건물들을 대체해 나갑니다. 상하이에 금융업 주도 시대가 도래한 것이지요. 상하이는 ‘동양의 뉴욕’, ‘동양의 월가’로 탈바꿈합니다. 1930년대 상하이는 인구 300만의 대도시로 성장하지만.사회적 격차도 크게 벌어졌고 동시에 여가를 즐길 여력이 생긴 중산계급이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오락과 서비스 산업도 발달합니다. 영국식 귀족문화 일색이던 상하이 나이트라이프에 미국풍의 쇼핑·음식·연예·영화가 밀려들고, 이른바 ‘상하이 모던’으로 불리는 독특한 대중문화가 탄생합니다. 얼마전 개봉한 존쿠삭 공리 주연의 '상하이' 라는 영화에서도 이런 모던하면서도 다소 퇴폐적인 도시의 분위기가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후 개혁개방이후 황포강 동쪽을 개발하면서 근대적인 빌딩들을 세우게 됩니다. 서울로 치면 강남개발이라고 할까요^^

다음날 일어나니 비가 부슬부슬내립니다. 아무리 이슬비라도 아이들을 비맞추며 데리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긴급히 작전회의^^. 그리고 일정변경, 실내로 들어가서 쇼핑을 하기로 합니다. 중국에 왔으니 빠질 수 없는 짝퉁명품 쇼핑 되겠습니다. 지하철 타고 상해과학기술관역으로 갑니다. 이 역에는 커다란 쇼핑센터가 붙어 있습니다. 처음에 얼떨떨해 하던 아줌마들, 물건 한 두개 사보더니 물건흥정에 신이 났습니다. 여행에서의 또 하나의 재미가 쇼핑 아니겠습니까? 200위안 우리돈 34000원에 집어 드는 명품백에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 큰넘 지원이가 명품가방? 하나 메고 자세를 잡아봅니다. 상하이 짝퉁시장은 몇군데가 있습니다. 이전에 상양시장이 없어진 이후로 몇곳으로 분산되었습니다. 일단 상하이 과학기술관지하철역에 붙어 있는 지하상가 되겠습니다. 상품의 질은 그리 높지 않지만 다양한 품목들이 잘 진열되어 있어 쇼핑하기 편리합니다. 식당도 여러 곳이 같이 있어 식사해결도 어렵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회해로(淮海路) 990번 빌딩 앞입니다. 건물이 공사 중이고 단속도 심해 상점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삐끼들이 많습니다. 삐끼를 따라가면 뒷골목 주택가로 들어갑니다. 품목은 가방과 시계가 대부분인데 품질은 좋은 편입니다. 다음으로 지하철 8호선 신촌역등 입니다. 짝퉁가방! 재미삼아 하나정도 사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쇼핑을 마친 후 저녁식사를 갑니다. 메뉴는 제가 좋아하는 훠궈입니다. 훠궈는 우리나라에는 샤부샤부라고 소개되어 있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중국요리 중 하나입니다. 이날 간곳은 샤오페이양(小패양) 이라는 훠궈 체인점입니다.

상하이 가는 모든 한국인이 들린다는 곳, 임시정부 유적지입니다. 사실 건물도 낡고 남은 유적도 없이 방치되다가 1990년대 이후 우리의 노력으로 다시 복원된 곳입니다.

이 사진이나 유물도 다시 복원한 것입니다. 사실 이 유적은 도심 재개발로 헐릴 처지가 된 것은 관심을 가진 몇몇 한국인들의 노력으로 복원해 놓은 곳입니다.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이후 대여섯갈래로 준비되던 임시정부 준비가 하나로 모아지면서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임시정부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대한민국임시정부(1919~45)의 수립은 국내에서 3·1운동의 민주적 정부형성의 의지와 해외각지에서 성숙된 민주공화적 자립의욕의 결과에 의해 복합된 2,000만 민중의 욕구분출로 가능해졌다. 지역적인 이점을 고려하여 상하이에 자리를 잡은 임시정부는 신규식(申圭植)의 터잡기와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의 다양한 민주공화적 전력을 승화·연결시켜 3권분립의 민주공화정부를 탄생시켰다. 먼저 이동녕의 주도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여기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제정·공포한 뒤 국무총리와 6부의 행정부, 국무원을 구성했다. 이어 1919년 4월 13일 의정원과 사법부의 3권분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민주정부를 출범시켰다' - 브리테니카백과사전 인용

백범 김구선생의 집무모습입니다. 너무 젊어서 이상하지요. 우리가 아는 김구는 나이가 지긋이 든 노인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지요. 해방후 우리가 접한 김구선생은 이미 70대입니다. 1920년대 상해의 40대 김구가 낯설은 것은 당연하지요.
이렇게 상하이 여행을 마무리하고 동양의 베니스라 블리는 水鄕마을 중 하나인 주쟈쟈오(朱家角)로 행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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