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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숭문육상부,숭문산악부 역사를 찾아서

2015-08-26 

필자는 참여하는 한국 산서회라는 모임이 있다. 한국 산서회는 말 글대로 산에 대한 책을 읽고 토론을 해보자는 모임으로 한국 산악계의 많은 원로분들이 참여하고 있는 단체이다. 지난 7월 모임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산악연맹 회장이셨던 박동욱 고문께서 해준 이야기 때문이다. 필자가 재직하는 학교를 알고 계신 박고문님은 1960년대 숭문고 산악부가 한국산악회 등반대회에서 1,2등을 휩쓸었고  그 기록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한국산서회회원들. 아래줄 왼쪽부터 회장이신 최중기 교수, 설악산 지키이를 자처하시는 박그림회원. 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장 이셨던 김영도 고문님.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이용대 고문님. (전)대학산악연맹 회장 박동욱 고문님. 권병하고문님. 남북극점, 베링해 원정을 성공시킨 홍성택 대장 등

순간 눈이 번쩍 뜨이며 머리속이 환해졌다. 다시 말씀 해주시시지요. 박동욱고문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다. 자료정리를 하다가 1960년 한국산악회 회보를 찾았다. 필사본으로 된 회보에는 1960년 5월 29일 열린 등반대회에서 숭문고 산악부가 고등부 1,2위를 휩쓸었다. 그것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장 빠른 기록으로. 바로 기록을 보여달라고 요청한다. 받고 보니 단기 4293년 7월에 발행된 한국산악회 회보인데 한자 필사본으로 또박또박 씌여있다.  
  

1960년 한국산악회 회보. 당시 시대를 증언하듯 필서로 작성되었다.

 오늘날 회보와 다름없이 회원들에 대한 이야기나 이사회보고 그리고 행사에 대한 결과들이 정리되어 있다. 한국산악회는 1945년 9월에 창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단체로서 1960년부터 산악단체 통괄을 위한 지역단체 등록을 시작했으며 1966년부터는 활자로 인쇄된 회보를 발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1960년의 회보는 각 단체들의 등록을 처음받던 시기에 정리된 것이다.  

1960년 5월29일 열린 단체등반대회 숭문고 A.B 팀이 고교부 1,2 등을 차지하고 했다. 특이한 것은 숭문고 팀의 기록이 일반부는 물론 대학부보다도 휠씬 앞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장을 보니 제10회 단체등행대회라는 이름으로  등반대회 결과가 정리되어 있다. 찾아보니 고등부 1,2위를 숭문고 A,B 팀이 차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것도 1시간 35분, 41분의 기록으로 대학부와 일반부 기록의 휠씬 앞서고 있었다.  코스를 살펴보니 경복고등학교에서 출발 자하문 문수암을 거쳐 대남문, 보국문 위문을 지나 백운대 정상에 이르는 코스다. 지금 간다고 해도 4,5시간은 충분히 걸리는 거리를 숭문산악부는 1시간 39분에 주파한 것이다. 

1960년 대학, 고교 산악부의 하계훈련지를 알려주고 있다. 숭문고 산악부는 7월25일 -  8월3일까지 지리산으로 하계훈련이 계획되어 있다.


그 다음 장을 보니 국내 외 산악계소식과 대만에서의 사고, 그리고 대학산악부와 고교산악부의 하계훈련 계획이 정리되어 있다. 숭문고 소식도 있나 얼른 찾아본다. 숭문은 7월 25일 - 8월 3일 지리산으로 하계훈련을 가는 것으로 나와 있다. 여러가지가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1960년대 숭문산악부가 있었다는 것도 처음 듣는 것이고 더구나 1960년 등반대회에 나가 1,2위를 석권했다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당시 등반대회에 참여하였던 선배님을 찾아낼 수 있었다. 숭산회 원년멤버이기도 하신 12회 이영환 선배님이 1961년에 이 대회에 참여하여 2등을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자세한 내용과 사진을 건네 받기로 한다. 그리고 얼마후 빛이 바랜 흑백사진과  등반 대회에 관한 메모를 전해주신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광화문에서 출발준비를 하고 있는 숭문고 및 다른학교 선수들. 모두 10kg의 모래주머니를 메고 있다.

 195,60년대 양정고와 한성고 산악부가 전국 최강의 자리를 구축하고 있었다. 늘 1,2 위를 독식하며 자신감이 하늘로 치솟던 양정고 한성고는 육상에서 전국 최강인 숭문고에 한가지 제안을 한다, 너희가 육상 중장거리 최강이지만 산에서는 우리가 최강이다. 산에서 장거리 경주를 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 한번 붙어볼 용의가 있는냐? 당시 숭문고 육상부 주장인 오일웅(3학년) 에 전달된 제의를 숭문에서 받아들여 1961년 10월 9일 한국산악회 주최 11회 단체등정대회에서 대결을 갖기로 한다. 이 대결에서 숭문은 A팀 1위 B팀 2위의 성적으로 거두며 양정고 한성고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다. 또 당시 최고의 대학 산악부였던 경희대 동국대 산악부도 숭문고 근처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록을 세웠고 당시 이 기록은 역대 경기사상 최고의 기록이었다. 그 다음해에도 숭문고 A,B 이 출전하여 압도적 기록으로 우승하였으나 두 팀 다 말도 되지 않는 트집을 잡아 실격처리하여 우승기를 반강제적으로 반납하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는 숭문고는 등산대회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찾아낸 한국 산악회 기록은 1960년의 기록이고 이영환 선배님의 진술은 1961년의 이야기이다. 한번 더 출전하였다는 말씀으로 보아 1962년 대회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번의 대회 모두 압도적 기록으로 1,2위를 석권한 것이다. 1960년 당시 입상팀을 보면 양정고 보인상고 경성전고 보성고 등이 보인다. 이영환 선배님이 말씀하신 한성고는 순위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한성고가 대회 순위에 들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영환 선배님이 보성고를 한성고로 기억하고 계실 수도 있다, 좀더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라 하겠다.

출발순간. 자세에서 긴장한 순간이 포착된다.

달리고 있는 선수들. 군화에 교모까지 쓰고 출전하였다.
 대회 규칙은 군화를 싣고 모자를 쓰고(숭문은 교모를 쓴것으로 보인다) 주최측에서 제공한 모래 10kg을 배낭에 넣고 1인 3조로 움직이는 것이다. 각조의 선두와 후미는 일정한 간격 이내에 있어야하며 그 거리가 5m가 넘으면 실격처리되는 것이었다.

3인조 단체 대회의 규칙은 엄격하여 같은 팀 선두와 후미가 5m 이상 차이 나면 실격이었다.

행사진행 규칙을 살펴보면 오늘날 산악마라톤과 유사하다. 단체 팀의 규칙이라든지 장비를 제한하는 것 등이다, 반면에 다른점도 있는데, 오늘날 산악마라톤대회는 개인 배낭에 대해서는 규제하지 않는다. 의무도 아니어서 오늘날 대부분의 선수들은 빈몸으로 출발하든지 아니면 조그만 배낭에 물정도만 휴대한다. 오늘날 산악마라톤 대회라는 이름으로 여러곳에서 대회가 열리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대회가 북한산과 설악산에서 열리는 대회인데 역사는 이제 20년 가까이 되어간다. 필자는 산악마라톤이 근래에 와서 생긴 대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산악회 기록을 보아 그 역사가 60년 가까이 된 것으로 보인다.    

경기 중 물을 마시는 것은 허락되어 양은 주전자에 공수된 물을 마셔가며 진행되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출전 선수가 양은주전자를 들고 있는 모습인데,  옆에 선수 번호표가 없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양은주전자로 물을 공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처럼 급수대를 마련하지는 않았으나 지원조가 양은주전자를 들고 선수들과 같이 달리면서 물을 주었던 것이다.  

결승점을 앞두고 막바지 백운대를 오르고 있는 숭문고 이영환 선수.

한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결승점이 백운대 정상이라는 것이다. 백운대 정상은 예나 지금이나 가파른 계단과 난간을 붙잡고 올라야 하는 곳이다. 정상부근도 그리 넓지 않아 많은 사람이 모이기 적합한 공간은 아니다. 당시 등반대회에 참가팀이 그리 많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당시 경제적 상황이나 등산 문화의 발달 정도를 보았을 때 등산을 했던 인구조차 매우 소수 였을 것이다.  

1961년 우승의 주역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병남, 백광용, 윤관수, 이영환 선수

비록 육상부로서 산악등반대회에 출전하였지만 3년간 내리 우승을 하며 다른 경쟁자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육상부의 역사이자 숭문산악부 역사의 첫 페이지를 시작한 사건이라고 하겠다. 하계 지리산 훈련까지 실시한 것으로 보아 기초적인 산악훈련도 진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숭문산악부는 1999년 창립하여 16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1960년부터 선배님들의 자랑스런 우승기록이 있으니 숭문산악부의 역사도 새로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즉 올해는 숭문산악부 창립 55주년인 것이다. 이제 숭문산악부는 자랑스러운 선배님들의 업적을 기리며  더욱 더 매진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우승후. 왼쪽부터 이병남, 윤관수, 이영환 그리고 주장이었던 오일웅 선수

현재 모교에는 전문적인 선수를 육성하는 운동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육상부도 십수년전에 해체되었고 한때 전국랭킹을 오르내리던 테니스부도 해체되었다. 대학입시를 주요목표로 하는 고교에 운동부가 반드시 필요한가는 다소 논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뛰어난 운동선수나 팀이 나올 수 있다면 학교 홍보에 많은 도움이되는 것도 사실이다. 흔히 방송이나 매스컴에 노출되는 빈도수는 곧 광고와 직결된다. 학교 이름을 알리고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즘에 와서는 연애인들이 이런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럼 면에서 운동부든 연예인이든 학교 홍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졸업생을 양성,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안해 본다.   

우승후 단체사진. 가운데 낵타이를 맨분이 당시 훈육주임이셨던 권영백 선생님.

 최근에는 고등학교 보다는 중학교 출신의 연예계 진출이 두드러져 보인다. 비로 알려진 정지훈부터 블락비의 박경, 최근 인기가 급상승중인 곽시양도 숭문 출신이다. 이런 친구들의 잘 활용한 학교 홍보도 꼭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1961년 7월 훈련을 마치고 교내에서

 산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신과의 싸음이다. 단체 등반대회라든지 스포츠크라이밍이라는 대회를 만들어 경쟁을 하기도 하지만 본질은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등산은 교육적으로 아주 유용하다. 16년간 산악부를 지도하면서 학부모들에게 가장 많은 들은 이야기가 있다. 아이들이 좀더 편안해지고 여유있어 졌다는 것이다. 산악부 생활 후 부지런해지고 매사에 열심히 한다 식의 군 제대 이후 들을 법한 이야기를 생각했던 필자는 처음에 적잖이 당황하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등산의 과정은 부지런함과 성실성 만으로 채울 수 없는 다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아이들과 단체 산행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보조를 맞추라는 것이다. 선두가 아무리 빨리 정상에 도착한들 마지막 후미가 도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등반은 후미가 도착해야만 마무리되는 것이다. 또 비좁은 텐트안에서 밥을 해먹고 부대끼며 자야하는 상황에서 양보와 타인에 대한 배려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유를 가져야한다. 결국 활달하고 운동신경 좋은 아이들보다는 의지가 있고 급하지 않은 녀석들이 더 적응을 잘하는 것을 경험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등산 인구 1500만의 시대라고 한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산에 다니다 보니 별의별 사건도 다 발생하는 것이 산이다. 이런 때 일 수록 필요한 것이 올바른 산악문화의 보급일 것이다. 이제 숭문산악부는 55년 역사를 믿거름 삼아 아이들에게 꼭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등산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여러 선후배님들의 많은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린다.